광장에서 우는 이들에 보내는 위로

2025-03-19

3월에 내린 폭설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장관을 보면서 뜬금없게도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떠올렸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2연은 국어교육을 받은 대다수 국민이라면 쉽게 읊조리는 구절이다. 이어서 유장하게 펼쳐지는 전체 11연은 아름다운 모국어의 향연이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4연)

시의 해석을 찾아보니 ‘지금은 남의 땅’인 식민지의 울분을 잊기 위해 몽상의 상태로 들어가 국토의 아름다움을 절절히 느끼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을 담았다. 그러고 보니 나의 연상도 맥락이 닿는다. 봄의 설경은 도시에서조차 자연의 장엄함을 일깨웠다. 41중 추돌 교통사고나 기후변화 같은 현실을 잊은 채, 막 새싹을 틔우기 시작한 나뭇가지에 얹힌 탐스러운 눈송이에 홀린 셈이다. 자연은 인간의 눈에 비정상으로 보일 때마저 위로를 주며 깊은 감정을 끌어낸다. 더구나 지금은 정치적 입장이 어쨌든, 모든 이들의 가슴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삭막하고 지루한 시간 아닌가.

12·3 계엄 선포 이후 헌재 탄핵심판 결정이 임박한 지금까지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광장의 대립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해방 80주년을 맞는 지금, 많은 이들이 해방공간의 극심한 좌우대립을 연상하며 두렵다고 한다. 트럼프와 푸틴은 정치 비즈니스를 위해 악수하는데 우리는 철 지난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를 논한다. 갈등의 뿌리에는 ‘역사 바로 세우기’와 ‘과거사 진상 규명’으로도 정리되지 않은 불화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있다. 누구에게는 미진하고 누구에게는 혹독한 청산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친위쿠데타는 은밀하고 교묘해서 잘잘못을 따지는 데 다시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백척간두인데 한가한 소리인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건 화합을 향한 노력이다. 전두환 시대에 어른이 된 나는 ‘진보’이고, 어린 시절에 겪은 6·25도 끔찍한데 월남전까지 다녀온 외삼촌은 ‘보수’이다. 집안마다 사정은 비슷하다. 이런 우리는 한 핏줄이고 같은 언어를 쓰며 좁은 땅을 나눠 쓴다. 정치지도자 누구이든 링컨처럼, 만델라처럼 더는 쪼개지지 말고 하나가 되자고 말해주면 좋겠다. 그 이유는 상대에게 잘못이 없거나 밉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러다가 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생명이 한순간에 꺼지는 것처럼 사회와 국가의 체력도 단기간에 고갈될 가능성이 크다.

문명사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대변동: 위기, 선택, 변화>에서 핀란드·미국·일본 등 7개국이 국가적 위기 앞에서 어떻게 대응해 흥하거나 망했는지 분석했다. 예컨대 1970년대 핀란드는 옛 소련의 군사적·정치적 무자비함 앞에서 굴종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는데 여기에는 약소국이면서도 자주권을 내세우다 1939년 소련의 침공을 당했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던 뼈저린 경험이 있다. 이 책의 핵심은 국가의 위기관리 방법이 개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를 인정하고 규정하며, 핵심가치를 살피고 자원을 점검해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를 개인의 연장이라거나 유기체라고 하면 자칫 파시즘적 사고로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이든 국가든, 나아가 지구든 우주든 똑같은 순간이 절대 반복되지 않는 일회적 과정이라는 점은 마찬가지다. 현재의 선택이 미래를 좌우하며 현재의 선택은 머릿속의 큰 그림 또는 이념이 아니라 현재의 실존을 좌우하는 감각에 기반할 때 가장 정확하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로지 영원한 것은 저 생명의 나무”라고 했던 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이론에 앞서는 게 생명이며 이는 개인의 삶에도, 사회적 삶에도 적용된다. 생명은 강인하지만 연약하기에 늘 조심하고 살펴야 한다. 지금 상황이 두렵다면 위험의 전조다.

며칠 전 어떤 속 깊은 분과의 대화 속에서 “지금 미국과 한국의 정치를 보면 최소한의 멜랑콜리도 없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는데 여운이 길었다. 멜랑콜리가 뭐였지? 그냥 우울과 비애가 아니다. “세상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아는 사람은 우울증 환자”(문화비평가 수전 손태그)라는 말처럼 가라앉음으로써 예민하고 기민해진 사람이다. 눈물 흘리는 사람이다(김상욱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주목받는 건 그가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우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지금 필요한 정치지도자의 미덕은 쪼개진 사람들의 슬픔을 들어주고 달래는 길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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