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손후익과 이재락의 독립군자금 모금

2025-01-25

김창숙을 만나면서 손후익은 독립청원운동에서 독립자금 모금운동으로 전환하였다. 독립자금 모금의 총지휘는 김창숙이 하고, 손후익은 경주·울산지방을 담당했다. 울산지역의 독립자금 모금 관계인들은 울산 입암의 손후익과 그의 부친 손진인, 입암마을 훈장 이우락, 김창숙의 사돈 울산 석천의 이재락이었다. 손후익이 직접 담당한 인물은 대구 부호 최해윤, 울산부호 이재락, 양산부호 정순모, 동래부호 오태환 등 4명이었다. 이재락만 협조적이었고 나머지에서는 독립자금을 후원받지 못했다.

유림에게 민족적 양심에 호소하며 모금을 기대했지만, 유림들은 생각만큼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 의병이나 계몽운동을 통해 이미 역량을 많이 소모한 점도 있지만, 김창숙이 주요 대상으로 삼았던 파리장서 서명자들의 의지는 한풀 꺾인 상태였다.

김창숙은 우선 10만 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진주 및 기타 지역의 사람에게 6만 원을 모을 계획을 손후락에게 맡겼다. 이재락은 손후익으로부터 김창숙의 잠입 소식을 듣고 대정 14년(1925)) 10월경(음력 9월) 대전 유성호텔을 찾아가 김창숙을 직접 찾아가 그의 계획을 들었다. 이때 이재락이 김창숙에게 귀순하기를 권유하자, 김화식은 언성을 높여 이를 꾸짖었다. 이재락은 소지한 돈 중에서 200원을 김창숙에게 주었다. 이재락의 장남 동립과 김창숙의 둘째 딸 덕기는 결혼을 한 사이라 김창숙과 이재락은 사돈이었다. 결혼할 때 김창숙은 독립운동 청원서를 들고 파리로 가기 위해 상해에 머물러 딸의 결혼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결혼 이후로 사돈 이재락과 김창숙은 이때 처음 만났다. 김창숙은 이재락이 재산이 넉넉한 사람이기에 만난 자리에서 자금을 내놓으라고 권고했다. 김창숙과 이재락이 사돈이 된 연유는 알 수 없다. 다만 한유학파와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손후익은 대정 14년(1925) 10월 30일경 달성군 달서면 원대동 최해윤 집에 가서 최해윤에게 김창숙의 귀국 목적을 알린 뒤 독립운동 자금으로 1만 원의 출금을 강요하고, 이에 불응할 때는 모험단원이 와서 생명을 빼앗을 것이라고 협박, 최해윤으로부터 1000원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손후익은 대정 14년(1925) 11월 6일경(음력 9월 20일경) 입암 윗마을 이우락(李宇洛) 집에 가서 김창숙의 목적을 알렸다. 이우락에게도 동래 철마의 오태환으로부터 출금 받는 것에 진력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우락도 동의하였다. 오태환은 ‘철마 오부자’로 불리는 대지주의 아들이었다. 1920년대 오태환은 구포은행이나 동래은행에서 같은 시기에 활동한 이들이 대한자강회, 동래청년회, 부산예월회 등 각종 사회운동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한 것과 달리 교육 운동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1940년 동래일신여학교를 인수하여 동래고등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로 개교하였다.

자금모집은 쉽지 않아 김창숙은 대정 14년(1925) 12월 스스로 자금모집을 하려고 결심하였다. 김창숙은 직접 대구로 가서 자금모집을 진두지휘했다. 영남지방이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불응자가 십중팔구였다. 울산군 방면의 자금모집 또는 출금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대정 15년(1926) 1월 4일경(음력 11월 20일경) 대구부를 출발하여 울산군 손후익, 이재락, 진주군의 하장환, 산청군(山淸郡)의 김우림(金佑林), 진주군의 하재화 등을 역방(歷訪)했다.

이재락은 대정 15년(1926) 1월 4일경(음력 11월 20일경) 대구에서 김창숙이 이재락을 만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만나지는 못하고 800원을 맡기고 돌아왔다. 이재락은 김창숙의 독립자금 모금에 총 1000원을 제공했다. 손후익은 대정 14년(1925) 10월 30일경 달성군 달서면 원대동 최해윤 집에 가서 최해윤에게 독립운동자금 1만 원을 출금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면서 불응할 때는 신건동맹단의 모험단원이 와서 생명을 빼앗을 것이라고 위협, 최해윤으로부터 1000원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당시 울산에서 대구로 가기 위해서는 울산에서 양산 물금까지 차를 타고, 물금에서 대구까지 경부선 기차를 탔다. 손후익은 김창숙의 계획에 따라 대정 15년(1926) 1월 중순경(음력 12월 초 무렵) 대구로 가던 도중 양산군 상북면 석계리 정순모(鄭舜謨, 1880~1938)에게 독립자금이나 김창숙 여비 제공을 요청하였다. 정순모는 경상도관찰부주사(慶尙道觀察府主事) 및 통정비서감승(通政秘書監丞)을 지낸 정인휘(鄭寅暉, 1861~1910)의 아들이다. 정인휘의 묘실인 경구재(景龜齋)에는 현재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의 기문(記文)과 팔경(八景)이 각 면에 조각되어 있다. 이로 보면 정인휘의 아들 정순모에게 독립자금 요청의 인연이 있었다.

정순모는 자선심 많은 자산가로 빈곤 농민을 대신하여 세금을 대납하는 등 선행을 한 인물이다. 1918년에는 안희제·최준(崔俊)·윤현태(尹顯泰) 등 11명이 중심이 되어 자본금 14만 원, 불입금 3만5000원 규모의 합자회사로 발전시켰을 때 정순모도 참여하였다. 이후 백산상회는 1919년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발전하였다. 1919년 조선국권회복단의 활동이 일제에 발각되면서 백산무역주식회사 중역과 대다수의 주주들이 일경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정순모는 1920년대 양산의 김철수(동경 2.8 독립선언 주역), 엄주화(양산독립만세 주역 엄주태의 형), 윤현태(상해 임정 재무차장 윤현진의 형, 백산상회 경영자) 등과 같이 의춘신탁을 경영하였다. 1923년 양산 유치원 설립과 북간도 대성중학교에도 기부하였고, 1928년 안희제가 창립한 중외일보(中外日報) 창립 주주였다.

손후익은 정순모에게 독립자금 1만 원의 제공을 요청하였으나 현금이 없다며 거절당하였다. 김창숙의 여비 제공도 여러 차례 요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다만 후일 2000원 출금할 것을 약속받았다. 약속 이행 여부는 알 수 없다. 훗날 정순모는 서울에서 이관술, 박헌영 등을 도왔다는 후손의 증언이 있다.

손후익은 대정 15년(1926) 1월 22일 대구부 남산정 박만윤 집에서 김창숙과 함께 군자금 모집과 독립쟁취를 결의하고 울산군 언양면 반송리 정영식(鄭永植, 27세)을 찾아가 그를 동지로 가입시킨다. 당시 이재락과 정연식은 경상남도 평의원이었다. <고등경찰요사>(1934)에 따르면 정영식은 본적과 주거지가 울산군 언양면 반송리 908번지로 양반, 농업, 鄭永植(32세)이다. 이우락은 본적과 거주지가 울산군 웅촌면 석천리 302번지로 양반, 농업, 李在洛(41세)이다. 이우락은 대정 15년(1926) 1월 4일경까지 수차례 오태환에게 독립자금 출금을 독촉하고 1월 21일 다시 오태환에게 그 뜻을 전달하였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이병길 작가 지역사 연구가, 항일독립운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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