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시간제로는 HBM 고객 요구 못 맞춰” 호소에…이재명 “공감, 할말 없더라”

2025-02-03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개발(R&D) 직원 90%가 1개월 단위로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하고 있는데, 월초엔 늦게까지 실험할 수 있지만 월말이 되면 (근무를 더 할 수 없어) 출근을 못한다.”(김태정 삼성글로벌리서치 상무)

3일 국회에서 열린 ‘반도체특별법 노동시간 적용 제외’ 토론회. 반도체 기업 R&D 직무에 한해 주52시간제를 적용하지 않는 내용의 반도체특별법 제정안이 8개월째 계류된 가운데, 법안에 반대해온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대표가 토론회를 주최하자 기업들은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주52시간제에 갇혀 옴싹달싹 못하고 있는 기업들의 현실을 봐달라”고 호소했다. 토론회엔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계를 대표한 4명과 전국삼성전자노조 등 노동계 측 4명이 참석했고, 2시간 30분동안 1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대표가 토론을 진행했다.

이날 김 상무는 “리더급 직원이 출근을 못하면 (실험) 진행 방향을 결정할 수조차 없다”고 토로했다. 주52시간을 지키면서 근무시간을 자율 조정할 수 있는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활용해 그나마 ‘집중 R&D’를 시도하고는 있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현재 상태로는 반도체 산업의 기존 경쟁력을 지키는 것은 물론, 미래 시장에 대비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반도체 개발에는 수없이 많은 실험과 검증, 실패와 반복의 시간이 필요한데 현 제도 하에선 칩을 구매하는 고객의 요구를 시한 내에 맞추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김재범 SK하이닉스 R&D담당 부사장은 “반도체 경쟁력 강화엔 시간이 중요한 요소이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 얼마나 빨리 대응하느냐가 핵심”이라며 “(AI 반도체인) 고대역폭메모리(HBM)는 대표적인 고객 맞춤형으로, 이런 ‘커스텀 메모리’ 시대엔 고객 요구도 다양해진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국과 반대 시간대 지역의 고객 요구도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경직된 근로시간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리함을 안고 비즈니스 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삼성 김 상무는 “현행 법은 기업이 (재량근무제를 선택한) 근로자에게 업무 수단과 시간 배분도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못하게 한다”라며 “반도체 개발 장비는 매우 고가인 데다 인프라도 제한적인데. 업무시간 지정 없이 일하기는 어렵다”라고 말했다. 토론이 길어진 가운데 이 대표가 “필요한 이야기만 하자”고 언급하자 김 상무는 “저에게 5분의 시간이 있다”며 끝까지 할말을 다했다.

기업들이 이토록 절실한 이유는 인공지능(AI) 산업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한국 반도체 경쟁력이 시험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후발 주자인 중국 기업들이 매섭게 추격하면서 빠르게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한국이 선두인 HBM도 최근 중국 딥시크 쇼크’ 이후 시장 전망이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매년 수조원의 적자를 내며 도전 중이지만 세계 1위인 TSMC(점유율 64.9%)와의 격차는 56%포인트 가까이 난다.

하지만 노동계 반발은 거셌다. 손우목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위원장은 “장시간 노동이 혁신을 가져오지 않는다. 오히려 숙련된 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게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정광현 SK하이닉스 이천노조 부위원장은 “SK하이닉스는 특별연장근로를 도입하지 않고도 최첨단 HBM을 엔비디아에 지속 공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SK하이닉스 김 부사장은 “현장에선 (특별연장근로가) 필요하다고 알고 있지만, 구성원 개별 동의와 고용노동부 장관 인가 등 절차로 실제 활용에는 어려움이 있어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장관 허가까지 받아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신청하지 않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반도체 업계는 미국·중국·대만 등 경쟁사들에 비해 한국 기업들이 불리한 여건에 있다고 본다. TSMC가 급부상한 결정적 계기는 R&D 인력을 24시간 3교대로 돌리는 ‘나이트 호크 프로젝트’ 덕분이고, 엔비디아 역시 미 실리콘밸리에서 노동강도 높은 것으로 유명해 ‘압력솥’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인데 한국은 집중 연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날 토론회에서 중재를 자처한 이 대표는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과 위기를 고려해 연봉 1억3000만원이나 1억5000만원 이상의 고소득 전문 연구인력을 대상으로 동의 하에 한시적으로 주 52시간 예외를 적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연구개발 분야 고소득 전문가들이 동의할 경우 예외로 몰아서 일하게 해주자는 게 왜 안 되냐 하니 할 말이 없더라”라며 “특정 시기에 집중하는 정도의 유연성을 부여하는 게 합리적이란 말에 공감이 된다”고 말했다. 노동계 반발에는 “이 정도는 합리적”이라고 받아쳤다. 기존 입장보다 전향적으로 변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반도체 R&D 외에 다른 직군·산업으로 예외가 확대될 수 있다는 노동계 우려에 대해 이 대표는 수차례 “의심하지 말자”고 강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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