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루미는 길거리에서 진우와 어깨를 부딪쳐 꽈당 넘어진다. 들고 있던 한약 팩들이 산산이 흩어진다. 진우는 넘어진 루미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긴커녕 차갑게 내뱉는다. “아이 씨, 조심 좀 해.” 뒤돌아 사라지는 진우 등 뒤로 화가 난 루미가 고함친다. “쟤 뭐라는… 야! 너나 조심해!”
왜 우리는 남들로부터 모욕이나 무시당했을 때 분노를 터뜨릴까? 분노에 대한 기존의 시각은 분노를 세밀히 묘사하거나 다른 대상에 비유한 다음에 인과적 설명이 다 끝났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분노는 외부 위협에 대한 공격적 반응이다’ 혹은 ‘분노는 심적 압력을 배출하는 증기기관이다’ 같은 말은 실상 공허하다. 새로 알게 된 것이 없다. 반면 분노라는 정서가 특정한 진화적 기능을 수행해 먼 과거 조상들의 번식에 도움이 되게끔 자연 선택된 심리적 적응이라는 진화적 시각은 새로운 발견을 이끈다. 분노가 어떤 가설에서 추측하는 기능을 잘해내는 데 필요한 특질을 과연 지니고 있는지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노는 어떠한 적응적 문제를 해결하게끔 진화했을까?
인류의 진화 역사에서 남들로부터 존중받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였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귀중한 친구나 동료로 인정한다면 그는 나를 도와주고, 내게 관심을 쏟고, 내 의견을 따르고, 내게 이유 없이 손해를 끼치지 않고, 내가 분쟁에 휘말리면 기꺼이 내 편이 되어줄 것이다. 이 모두는 먼 과거의 수렵·채집 환경에서 내 번식 성공도를 높여준 지렛대였다. 반면 누군가가 나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그는 넘어진 내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소한 친절도 베풀지 않을 것이다.
하이델베르크대학교의 진화심리학자 에런 셀(Aaron Sell)은 분노는 상대방으로부터 더 좋은 대접을 받아내고자 협상하게끔 자연 선택된 정서라고 제안했다. 내가 상대에게 바라는 정도보다 상대가 나의 안녕을 별로 신경 쓰지 않음이 포착되었을 때, 분노를 터뜨려서 상대가 나의 안녕을 더 중시하게 했던 조상이 더 많은 자식을 후대에 남길 수 있었다. 한마디로, 분노의 진화적 기능은 상대방 머릿속에 있는 내 가치의 조절 스위치를 내가 바라는 수준까지 밀어 올리기라는 가설이다.
분노가 상대로부터 더 좋은 대접을 얻고자 협상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화했다면, 분노를 터뜨리는 성향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협상 능력에 의해 제한될 것이다. 협상 능력이 큰 사람은 남들로부터 더 나은 대우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다. 따라서 남들과 조금이라도 시비가 붙으면 더 쉽게 분노하리라고 예측된다. 반면 협상 능력이 적은 사람은 시비가 벌어졌을 때 바로 화를 내기보다는 애써 무시하거나, 꾹 참거나, 두고두고 원한을 품는 등 다른 전략을 구사하리라 예측된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인류의 진화 역사에서 남성의 협상 능력은 싸움이 벌어졌을 때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신체적 힘(특히 상체 근력)에 크게 기대었다. 남성은 여성보다 근육량이 약 61% 더 많고, 그 차이는 주로 상체에 몰려 있다. 상체 근육이 내는 힘을 비교하자면, 남성은 여성보다 90%나 더 강하다. 이러한 성차는 남성들은 배우자를 얻기 위한 동성 간의 신체적 경쟁에 더 내몰리게끔 진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셀의 가설에 따르면 상체 근력이 강한 남성은 상체 근력이 약한 남성에 비하여 별것 아닌 일에도 자주 화를 내고, 과거에 누군가를 힘으로 제압한 경험이 더 많고, 국가 간의 분쟁에 대해서도 무력 사용을 더 지지할 것이다. 셀은 이 예측을 미국 대학생, 스위스 청소년, 직업 운동선수, 아프리카의 수렵·채집민 아카(Aka)족 등 여러 사회에서 되풀이해서 확인했다. 참고로 과학은 현상을 설명할 따름이다. 결코 나쁜 짓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뭐야? 상체 근육이 발달한 남성은 원래 걸핏하면 화를 내도록 타고났으니, 성질부려도 다 받아줘야 한다는 말이야?”라고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분노가 상대로부터 더 나은 대접을 받고자 흥정을 벌이기 위한 심리적 적응이라는 가설은 그 밖에도 흥미로운 제안을 내놓는다. 예를 들어, 분노하면 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코를 넓히고, 눈썹뼈를 내리고, 입술을 앙다무는 표정을 짓는다. 왜 분노하는 표정은 이런 모습일까? 셀은 이러한 분노 표정은 상대를 똑바로 보고, 산소를 많이 들이마시고, 양 이빨로 상대를 꽉 물어서 놓지 않을 것임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깊은 뜻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