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6공화국에 살고 있습니다. 1987년 민주화로 만들어진 헌법이 6공화국 헌법이며, 이후 헌법개정이 없었기에 지금도 6공화국입니다. 6공화국의 출발이 노태우 정부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처한 국내외적 정치환경의 큰 틀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 만들어졌습니다.
'노태우 비사(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66)'는 좁은 의미에서의 6공화국, 즉 노태우 정권에 대한 얘기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6공화국의 뿌리,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의 틀이 만들어진 시대상황을 추적하고 분석합니다.
제6부. 노태우 레거시 ‘북방정책’과 ‘북핵’
3회. 덩샤오핑의 김일성 설득과 신중한 한·중 수교

중국, 수교 서두르는 한국에 ‘수도거성’
수교를 서두르는 한국을 향해 중국은 ‘수도거성(水到渠成)’이라고 말하곤 했다. ‘물이 흐르면 도랑이 생긴다’는 뜻. ‘교류하다 보면 저절로 수교에 이르게 되니 서두를 필요 없다’는 의미다. 급전이 필요했던 고르바초프와 달리 덩샤오핑은 느긋하게 큰 그림을 그렸다.
중국이 국교 수립에 신중했던 가장 큰 이유는 북한 설득이었다. 북한과 중국 간에는 오랜 비밀협정이 있었다. 1956년 중국이 한국전쟁에 파견했던 인민해방군을 철수시킬 당시 마오쩌뚱은 불안해하는 김일성을 다독거리고자 비밀협정을 맺었다.
‘양국 수뇌는 연 1회 정기 수뇌회담과 필요시 수시 수뇌회담을 통해 양국이 직면한 문제를 협의 결정, 공동 대응한다’(오진용 저 『김일성 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비밀협정은 김일성 시대 북·중 관계에선 기본조약으로 중시됐다. 김일성은 거의 매년 중국을 방문했으며, 그때마다 마오쩌뚱이 직접 상대해 주었다. 보기 드문 예우다. 마오쩌뚱 사후엔 새로운 지도자 덩샤오핑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한·중 수교 과정에서 덩샤오핑은 끈질기게 김일성을 어르고 달랬다.
덩샤오핑이 집권한 것은 1978년. 중국은 일찌감치 한국에 주목했다.1980년 1월 25일 황화 외교부장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 “대문은 닫혀 있으나 자물쇠는 채우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막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 무렵 덩샤오핑은 김일성을 만나 중국의 대외정책 변화를 설명해 주었다. 1980년 4월 18일 선양으로 김일성을 초대해 “중국과 미국, 소련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에 반대한다. 북조선 혼자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북조선이 남조선에 대한 우위를 장악하려면 경제적으로 앞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일성에게 ‘도발 금지’를 환기하고, ‘개혁·개방’을 권고한 것이다.
(계속)
그러던 어느 날, 돌발사건이 한·중 관계 개선을 촉발했다.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 오후 2시 전국에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중국 민항기가 북한을 거쳐 남한으로 넘어왔다. 중국인 납치범 6명이 ‘중화민국(대만)으로 가자’며 기장을 위협하던 중 연료가 떨어져 춘천 미군기지에 비상착륙했다.
놀라운 것은 곧바로 중국 정부에서 직접 교섭을 요청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비슷한 사건이 있어도 중국 정부는 직접 나서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중국의 요청을 즉시 수락한 것도 전례 없던 일이었다. 전두환 정부 역시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국은 처음으로 상대방 국기를 걸고 국호를 부르며 회담했고, 공개 합의문에 서명까지 했다. 양국을 서로 인정한 셈이다. 한국 정부는 납치된 중국인 승객들을 최고급 호텔(워커힐)에 재워주면서 서울시내 관광, 삼성전자 견학까지 시켜주었다. 출국할 땐 당시 사치품이었던 컬러TV까지 한 대씩 안겨주었다.
10여년의 시간이 흐르며 양국은 화해 무드를 가졌다. 수교에 가속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