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는 지난 7일 세계 정상 중 두 번째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폭탄’ 앞에 각국이 전전긍긍하는 상황에서였다. 일본에선 이시바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과 ‘궁합’이 맞지 않을 것이란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보란 듯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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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번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끈 건 트럼프 1기 시절의 ‘아베 레거시’였다. 이걸 물밑에서 조율한 거물 정치인이 있었다. 트럼프의 대선 출마에 앞서 1년 전부터 "아베 팀을 다시 결집해야 한다"고 총리관저에 조언한 아마리 아키라(甘利明·75) 전 자민당 간사장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최측근이자 일본의 경제안보 정책을 진두 지휘한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자민당 내에선 아베, 아소 다로 (麻生太郎)전 총리와 함께 '3A'로 불릴 만큼 오랜 기간 실세로 통했다. 현재도 당내 반도체전략추진의원연맹 명예회장을 맡으며 일본의 '미래 먹거리' 전략 수립에 간여하고 있다.
아마리 전 간사장은 26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트럼프 1기 당시 ‘팀 아베’의 핵심 멤버로 뛰었던 경험을 토대로 구체적인 ‘트럼프 2기 대응법’ 등을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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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한 지 한달이 넘었다. 트럼프 대통령을 어떻게 봐야 하나.
“트럼프 대통령은 기존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발상을 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이자 군사 대국의 정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를 무시할 수도, 대적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보편 관세를 계속 거론한다.
“미국은 디지털 분야에서 엄청난 흑자를 내고 있고, 앞으로도 그 격차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제조업을 경제의 중심으로 보고 있다. 이는 대통령 선거의 '경합주(swing state)'에서 제조업이 쇠퇴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추가 관세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은 미국 내 제조업 투자를 확대하기 위한 수단이다. 각국은 미국의 '러스트 벨트' 지역에 어떤 선물을 제시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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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우방 공급망 중요성 인식시켜야”
한국과 일본 모두 반도체가 추가 관세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내에서 모든 반도체를 생산할 수는 없다. 따라서 미국·일본·한국·유럽연합(EU) 등 동맹·우방 간 공급망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게 중요하다. 최첨단 반도체는 미국의 동맹·우방이 주도권을 갖고 있지만, 범용 반도체 공급망은 중국이 장악하려 하고 있다. 만약 범용 반도체를 중국이 독점한다면 그것은 곧 중국의 ‘강력한 경제 무기’가 될 것이다. 따라서 범용 반도체 분야에서도 중국을 능가할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미국의 동맹·우방이 협력하는 공급망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시바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의 첫 회담을 어떻게 평가하나.
“'아베 레거시' 덕에 무난하게 넘어갔다고 본다. 나는 (트럼프의) 출마가 예상됐던 1년 전,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협상에 임했던 관료들을 다시 총리관저에 결집시킬 것을 요청했다. 이시바 총리의 방미 전 트럼프 대통령의 통역을 맡았던 다카오 스나오(高尾直) 외무성 일미지위협정실장 등 외무성 간부들이 보고를 위해 찾아왔다. ‘팀 아베’가 외무성을 중심으로 재구성됐고, 신중하게 정상회담을 준비했다.”
당초 이시바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이 다르다는 평가가 있었다.
“이시바 총리는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스타일인데, 트럼프 대통령과 전혀 맞지 않는 것 같다. 아베 아키에(安倍昭恵) 여사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찬 자리에서 '이시바 총리를 잘 부탁한다'고 요청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키에 여사에게 예우를 갖추며 최대한 배려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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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설득 아닌 분위기로 이끌어야”
이시바 총리는 아마리 전 간사장이 제안한 ‘팀 아베’의 경험을 살려 철저히 준비했다. 이시바 총리는 자신의 스타일을 잠시 내려놓고, 트럼프 대통령의 피격 사건을 언급하며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등 극찬을 나열하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다가갔다. 이어지는 일문일답.
아베 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어떻게 친밀한 관계를 구축했나.
“아베 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논리적으로 설득이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경험상 잘 알고 있었다. 일례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아무리 신조가 부탁을 해도 이미 선거 때 공약을 했기 때문에 (탈퇴는) 어쩔 수 없다. 게다가 한번 가입하면 탈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당시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경제재생담당상이 '실례지만 대통령 각하, 3개월 후에 탈퇴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응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가짜뉴스!'라고 소리쳤다. 모테기 장관은 예를 갖춰 정중하게 설명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부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격노했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른 뒤 아베 총리가 '도널드, 이 문제 말인데…'라며 다른 화제를 꺼내자 트럼프 대통령은 '신조, 그 일은 말이야…'라는 식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답했다.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기보다는 분위기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라면 트럼프 대통령과 궁합이 잘 맞지 않았을까. 윤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을 대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윤 대통령은 지지율 하락에도 일·한 관계를 중시한 몇 안되는 한국 정치인이다. 일본 정부도 일·한 관계 개선을 위해 윤 대통령과 함께 일하고 싶었다. 굳이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아도 충분히 정국을 헤쳐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윤 대통령이 왜 강경 대응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쨌든 일·미·한의 연대가 중요하며, 이는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이익이 된다.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할 때는 '해야 한다'는 당위론이 아니라, 손익 계산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게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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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리 전 간사장은 2021년 자민당 내 반도체전략추진의원연맹을 발족해 일본 반도체 산업 부활의 선봉장 역할을 해왔다. “2030년까지 10조 엔(약 96조6000억원) 이상의 공적 지원”을 담은 이시바 정권의 반도체 정책도 ‘팀 아마리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일본 반도체 전략의 핵심은 뭔가.
“흔히 반도체 전략은 육상 삼단뛰기(홉-스텝-점프)에 비유되곤 한다. 일본 반도체 전략의 '홉(Hop)'은 TSMC의 유치다. 지난해 2월 TSMC의 구마모토 제1공장 개소식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오늘의 1위가 내일도 1위일 것이란 보장은 없다. 일본에 새로운 기술의 싹이 틀 것이라 기대했기에 TSMC가 찾아온 것'이라고 인사말을 했다. 일본 정부는 2030년까지 10조 엔 이상의 공적 지원을 발표했다. 일본이 이렇게 장기적으로 (지원을) 약속한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전 세계가 이를 주목하고 있고, 일본에 투자해 생산 거점을 마련하고 있다. '스텝(Step)'은 일본이 세계 첨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한 '라피더스'(토요타·소니·소프트뱅크 등 일본 8개 기업이 합작해 2022년 설립)의 출범이다. 그리고 '점프(Jump)'는 반도체의 최종 형태라 할 수 있는 광(光)반도체인데, 현재 NTT가 기술 개발 중이다. 이로써 일본은 반도체의 ‘홉·스텝·점프’ 3요소를 모두 갖추게 됐다.”
아마리 아키라 전 자민당 간사장
가나가와현 출생. 게이오대 졸업. 1983년 중의원 의원 첫 당선 후 2024년까지 13선 역임. 경제산업상, 경제재생담당상, 자민당 간사장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