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은 바람이다.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일어나 미친 듯 춤을 추면 고생은 따 놓은 당상이다. 왜냐하면 최고의 고생은 마음고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 마음고생을 하는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안에서 폭풍이 지나갈 때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는 모른다. 그때 ‘나’를 지나갔던 비바람의 정체를. ‘나’를 쓸어버릴 수도 있는 그 엄청난 에너지를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이 생길 때 『데미안』에 나오는 아브락사스에 공감한다.
춤과 노래는 옛부터 혼을 담는 매체
공동체 통합을 이뤄주는 신성한 것
‘케데헌’을 보면서 연상된 『데미안』
제자리를 찾기까지는 방황의 연속

신이면서 악마인 아브락사스는 영지주의의 핵이다. 온전하게 살기 위해서는 정의와 질서, 능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들끓는 욕망과, 근원은 알지도 못할 혼돈과 방황의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아브락사스는 내 안의 악마라고 해도 좋을 욕망과 고통을, 외면하고 통제해야 할 악이 아니라 대면하고 수용하도록 돕는 신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는데 자연스레 겹쳐진 것이 바로 그 『데미안』이었다. ‘케데헌’은 아브락사스 철학의 케이팝 판이라 읽어도 될 것 같다. 물론 이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그 철학적 깊이에서 온다고 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잘 생긴 주인공들, 귀에 박히는 음악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따라 하다 보면 흥이 돋는 매혹적인 춤일 것이다. 케이팝 아이돌들이 합숙해가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세계를 홀렸던 춤을, 환상 속 아이돌들은 힘도 들이지 않고 세계를 열광시키고 있다. 먹지도, 자지도, 늙지도 않은 아이돌과 현실의 아이돌, 어느 쪽이 실재고, 어느 쪽이 환상일까. 팬들의 입장에선 환상과 현실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까.
알려졌듯 ‘케데헌’은 볼거리도 많고 들을 거리도 많아 눈과 귀가 호강한다. 그 중엔 ‘사자보이즈’의 옷차림도 있다. 사자보이즈의 사자는 세상에, ‘저승사자’를 일컫는 것이었다. 갓을 쓴 저승사자가 저렇게 도발적일 수 있을까. 칙칙하기만 한 저승사자의 도포도 케이팝을 만나 춤을 입고 노래가 되니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다. 그 와중에 아브락사스의 진실을 보여주는 철학은 그 전체적인 판에 살짝 입힌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도 그 이야기의 구조는 중요하다. 그것이 애니메이션 전체를 받치고 있는 뼈대이기 때문이다.
‘사자보이즈’의 진우는 영혼을 팔아 아이돌이 되고, 아이돌이 되어 영혼을 사냥하는 빌런이다. 빌런은 끌어내려야 한다, 그런데 노래로 어떻게 빌런 짓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노래로 어떻게 빌런을 물리칠 수 있을까?
고대에서부터 춤과 노래는 혼을 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매체였다. 혼을 담은 춤과 노래는 ‘나’의 두려움, 우리의 두려움을 에너지를 전환해서 공동체를 통합하게 해주는 신성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런 노래를 만들어 함께 부르는 자를 적과 싸우는 전사라 부르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겠다.
전사 중의 전사, 가수 루미가 가사를 쓴다. “끌어내려, 치워버려…” 악마의 문양을 가진 자를 무너뜨리려는 노래는 공격적이다. 그런데 가사를 쓰는 과정에서 루미가 바뀐다. 역시 문양을 가진 자로서 루미는 본능적으로 진우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루미가 다시 쓴다. ‘네 문양이 드러날 때 그 아래 숨겨진 고통이 보여!’
마음속 숨겨진 고통, 『데미안』의 출발점이다. 숨겨진 고통이 어둠의 표식의 원천이다. 데미안이 선한 아벨이 아니라 표식을 가진 자 카인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어둠의 낙인이 부활의 드라마를 만드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물론 루미와 진우는 서로가 지닌 표식의 원천이 달라 처음에는 적으로 만났지만, 처음부터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를 자극했다. 『데미안』의 피스토리우스의 말이 생각난다. 내 안에 있지 않는 것은 ‘나’를 자극하거나 흥분시키지 않는다는 말! ‘나’를 자극하는 것,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를 성장시키는 힘이다. 귀마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 과정 속에서 보여준 진우의 행태는 그가 자기를 완전히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온전히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진우는 영혼을 팔았던 자다. 그런데 그대, 영혼을 믿는가. 그리고 그 영혼은 무엇인가. 그것은 끝내 팔아서는 안 되는 자존심인가. 그대, 영혼을 팔지 않는 파우스트를 상상해본 적이 있는지. 자기 앞의 세상이 온통 수렁이어서 삶을 느낄 수 없는데, 영혼이 뭐라고 영혼을 고집할까. 파우스트가 영혼을 팔지 않았다면 그는 그냥 지식에 갇혀 삶으로 나가지 못한 채로 살다 죽은 답답하고 고루한 샌님 혹은 책상물림일 뿐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길을 간다. 자신만의 길, 고유한 길을 찾아가고자 하는 이는 묻게 되어있다. 내 자리는 어디인가. 자기 길을 찾아가기 위한 몸부림 그 자체가 길이었음을 알게 되기까지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면 금수저라도 소용없다.
“유령 같았던 나, 난 내 자리를 찾지 못했어. 문제아라 했지. 거친 성격 탓에. 하지만 그게 여기까지 날 이끌었어.” ‘골든(Golden)’을 부르는 루미의 마음, 카인의 후예다.
여기가 내 자리가 아닌 느낌, 아프고 시린 일 많아 내 자리를 찾아 방황하다 보면 이상하게도 루미처럼 나를 키운 것은 바로 악이라는 이름의 혼돈과 방황이었다고 느끼게 된다.
이주향 수원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