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착 벤치 위해 영화 만든 일본 감독..."혁오 뮤비 찍고 싶어요"

2025-08-01

공사를 앞둔 도쿄 강변 공원에 덩그러니 놓인 낡은 나무 벤치.

각각의 사연을 지닌 이들이 여기에 앉아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는다. 오랜 친구 이상의 관계를 원하는 젊은 남녀가 감춰둔 마음을 조금씩 드러내고, 이별 위기의 커플이 주고 받는 날선 대화에 제 3자인 중년 남성이 갑자기 끼어든다.

사랑의 상처로 인해 벤치 주변에서 노숙 생활을 하는 언니는 자신을 찾아온 동생과 거친 말싸움을 벌인다. 대화의 소재와 온도는 각각 다르지만, 한결같이 진심이 묻어 나는 대화의 향연이다.

영화 '엣 더 벤치'(지난달 30일 개봉)는 낡은 벤치를 오가는 이들의 사정과 속마음을 5개의 에피소드에 담은 옴니버스 작품이다. 벤치 주변, 단 한 곳에서만 촬영한 실험적인 영화지만, 보고 나면 가슴에 따뜻하고 아련한 온기가 퍼진다. 벤치처럼 우리 곁에 조용히 머물다 사라져 간 모든 것들, 그 소중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사진 작가, 뮤직비디오·CF 감독으로 활동 중인 오쿠야마 요시유키(34)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히로세 스즈, 이마다 미오, 구사나기 쓰요시, 요시오카 리호 등 일본 유명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베이징·타이베이·상하이 국제영화제에 초청돼 수상과 함께 호평 받았다.

지난달 31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오쿠야마 감독은 자신의 오랜 추억이 새겨진 집 근처 벤치가 영화의 출발점이었다고 했다.

"어릴 때 할머니와 산책하다 앉기도 하고, 친구들과 고민을 나누던 소중한 벤치예요. 원래 세 개였는데 나머지 두 개는 강이 범람해 떠내려갔죠. 대교 공사로 언제 철거될 지 모르니 예술 작품으로 남겨두자는 생각에 벤치를 소재로 한 대화극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영화가 개봉된 뒤 벤치를 찾아오는 분들이 있다. 영화 속 장면처럼 벤치에 앉아 초밥을 드시기도 한다"며 "얼마 전 벤치 근처에서 야외 상영 이벤트를 했는데, 벤치와 함께 영화를 보는 듯한 귀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5개의 에피소드는 주제와 정서에 따라 카메라 각도가 각각 다르다. 같은 남녀가 등장하는 1·5화는 카페에서 옆 테이블 대화를 듣는 느낌으로 등 뒤에서, 이별 위기의 커플이 나오는 2화는 정면에서 촬영했다. 자매가 격한 말싸움을 하는 3화는 광각렌즈를 사용해 카메라를 움직이며 찍었고, 관점을 소재로 한 4화는 다양한 시점의 장면들을 담았다.

오쿠야마 감독은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도록 촬영 현장에 최소한의 인원만 배치했고, 배우들과 활발하게 의견을 교환했다"고 말했다. "롱테이크로 15분 정도 연극처럼 이어간 부분도 있다"면서 "애드리브, 머뭇거리거나 실수한 부분까지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고 설명했다.

벤치를 철거하러 온 공무원들을 그린 4화는 오쿠야마 감독이 직접 각본을 썼다. 이들의 예상치 못한 정체(외계인)를 통해 그가 강조하려 한 건 '다면성'이었다.

"각도와 시점에 따라 사람이나 물건, 현상이 다르게 보이잖아요. 세계는 다면으로 구성돼 있는데, 한 면만 보고 단언하고 믿어버리는 것에 의문을 갖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에피소드에 나온 것처럼 벤치가 어떤 사람에겐 아버지일 수도 있거든요."

고등학생 때도 같은 동아리 방을 배경으로 한 옴니버스 영화를 만들었다는 그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보편적인 주제와 다층적인 이야기를 그려내는데 관심이 많다"면서 "사진이든 영화든 모순과 아이러니를 통해 세상의 본질에 근접해가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 인디밴드 혁오와 뮤직비디오를, 배두나 배우와 영화를 찍고 싶다고 덧붙였다.

올 가을에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를 실사화한 영화를 한국 관객들에 선보인다. 그는 "실사 영화인 만큼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무의식적 망설임, 동공의 움직임 등을 최대한 살려서 표현했다 그런 미세한 감정의 떨림을 포착하는데 집중했다"며 "인생에 대해 불안과 초조를 느끼는 30대 청년들을 다독거려 줄 작품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음 작품으로 차 안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그린 옴니버스 영화를 구상 중이라는 그는 "옴니버스 다음에 장편을 찍는 패턴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공사 현장이 많은 도쿄에는 편리함의 뒤안길에서 사라져가는 소중한 것들이 많습니다. 동네 벤치가 제게 소중했던 것처럼, 누구나 애착 가는 장소나 사람이 있을 겁니다. 한국 관객들도 이 영화를 보고 소중했던 누군가나 장소를 떠올려 그 장소를 다시 찾거나 대화를 건네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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