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인문학] 씩~, 하고 한번 웃어봐! 그것처럼 강한 카리스마는 없어!

2024-10-17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기쁜 소식에 한동안 잠을 뒤척였다. 그의 글 속에 무엇이 담겼을까? 한참을 읽다가 문득, 도스토옙스키의 <죄와벌>속에 라스콜리니코프의 이성의 마비와 죄의식이 생각났다. 조금 더 생각의 깊이를 확장시키니 내가 존경하던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고독. 그리고 '평화는 전쟁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던 말씀이 생각났다. 독일 조국의 배신, 부친의 사망, 아내의 조현병, 그리고 아들의 입원. 결국 그도 정신병치료를 받게 되었고 그 이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안개 속으로>는 그의 고독이 뚝뚝 묻어나는 외로움의 실체다. 이순신이 그러했을 터~, 어찌 보면 우리 모두는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가 아니겠는가?

고독한 절대 공간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다. 2차 세계대전 때 공군 조종사로 임무 수행 중 비행기 불시착으로 일본군에게 잡혀 포로수용소에서 죽을 만큼 가혹한 시련을 견뎌냈던 실존인물 루이 잠페리니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언브로큰, 2014>이나 비슷한 소재의 한국영화 <군함도, 2017>는 포로수용소라는 항거불능인 절대공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가 하면 <빠삐용, 1973>과 <쇼생크 탈출, 1994>은 탈출이 불가능한 감옥소라는 공동공간에서 한계를 극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며 <로빈슨 크로우소, 1997> <캐스트 어웨이, 2001> <마션, 2015>은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시련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려주는 대표적인 영화들이다.

그러나 영화를 쭉 관통해서 들어가 보면 그 영화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국 시련의 '즐김'이란 걸 안다. 이걸 놓치면 영화를 보는 이유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고 발밑에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를 깔고 앉아 10년 동안 찾아 헤맸던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1899~1939)와 같은 허망함까지 느낄 것이다. '왜(Why)?' 라는 이유를 포기하지 않았던 카터가 결국에 왕가의 계곡에서 이집트 제 18왕조 12대 파라오 투탕카멘(재위 BC1361~BC1352)의 무덤을 찾은 것처럼 위대한 발견에는 반드시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의 생활은 한계적 상황에서만 볼 수 있는 인간군상의 모든 모습들이 그대로 들어난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겁해 질 수 있으며 또한 반대로 얼마나 자애로울 수 있는가?를 날것으로 볼 수 있다. 수용소 내에서 같은 수감자들을 등쳐먹는 악랄한 지옥의 사자 '카포(Capo)'가 있는가 하면 같은 처지의 수감자들을 정신적으로 위로하고 지켜주는 위대한 스승 '구루(Guru)'도 있었다. 그야말로 선과 악의 경연장이고 야만과 신성이 함께 뒤섞인 공간이다. 과연 그 속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 빅터 플랭클은 그의 책 속에서 만약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필자는 그가 발견하고 깨달은 의미치료를 아마 신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아우슈비츠에서 바바리아 수용소로 이송되는 호송열차에 동물처럼 실려 이동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공포와 절망 그리고 삶을 포기한 암울한 유대인들의 표정이 스치듯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호송열차에서는 석양빛으로 막 물들기 시작한 찰츠부르크 산의 정상을 경외롭게 바라보는 신을 닮은 인간만 있었지 절대로 삶과 자유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의 얼굴은 찾아 볼 수 없었다고 언급한 그의 설명은 시련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의 본능적 몸짓을 읽을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대목이었다.

그 뿐만 아니다. 어느 날 저녁 죽도록 힘든 노동에 시달려 늘어진 몸으로 막사 바닥에 앉아 수프를 먹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동료 한 명이 달려 와 모두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무슨 큰 일이 일어난 줄 알고 밖으로 뛰어 나갔던 동료들 앞에 펼쳐진 광경은 점호장 너머로 지는 아름다운 석양의 노을빛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감동으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어 사람들 사이로 새어나온 작은 감탄사!

"아!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희망과 꿈 그리고 내일이 소멸된 사람들에게 나올 수 있는 감정의 이야기라고는 결코 상상할 수 감탄사다. 어떻게 이런 상황과 환경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머리로 이해할 수 없어 가슴으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도 어렵다. 세상살이의 단수가 9단이 넘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의 말인가? 아니면 모든 걸 내려놓은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신성(神性)의 경지인가?

소설가 한강의 고독과 절망을 이겨내는 힘의 원천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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