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멕시코 정부가 10월 1일로 예정된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식을 앞두고 세계 각국 정상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이는 멕시코 외교부의 오랜 관행으로 ‘꼭 정상이 아니더라도 축하 사절단이 와줬으면 한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당연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도 초청장이 전달됐다. 그러자 푸틴이 직접 참석 여부를 밝히기도 전에 우크라이나가 흥분하고 나섰다. 우크라이나 외교부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저지른 전쟁 범죄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가 푸틴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한 점, 멕시코는 ICC 설립을 위한 로마 협약 당사국인 점 등을 거론하며 멕시코 정부를 향해 “푸틴이 멕시코에 입국하면 즉각 체포영장을 집행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당시 멕시코 대통령은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물론 푸틴은 멕시코에 가지 않았다. 다만 멕시코 정부의 단호한 태도는 푸틴에게 ‘ICC 협약 가입국에 가더라도 체포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음이 분명하다. 이후 푸틴은 9월 2, 3일 이틀 일정으로 몽골을 방문했다. 몽골 또한 멕시코와 마찬가지로 ICC 협약에 가입한 상태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는 몽골 정부에 “푸틴이 울란바토르 공항에 내리는 순간 체포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다. 몽골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크레믈궁은 몽골 수사기관이 푸틴의 신병을 억류할 가능성에 대해 “전혀 우려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실제로 푸틴은 1박2일의 몽골 방문 일정 내내 체포는커녕 극진한 환대만 받고 귀국했다. 유럽연합(EU)은 “ICC 협약 당사국으로서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몽골 정부를 나무랐다.
최근 ICC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대해 반(反)인도주의 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2023년 10월부터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전쟁 중인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근거지인 가자 지구에서 1년 넘게 민간인 학살 등 전쟁 범죄를 저질러왔다는 사유를 들었다. 이스라엘의 맹방인 미국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서 “터무니없다”는 말로 ICC의 결정을 비판했다. 미국은 ICC 협약 가입국이 아닌 만큼 그 조치를 이행해야 할 법적 의무도 없다. 하지만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은 속내가 복잡해졌다. 현재 EU 회원국은 모두 ICC 협약에 가입한 당사국이기 때문이다. 이달 25, 26일 이틀 일정으로 이탈리아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외교장관 회의는 네타냐후 체포영장 발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논의했다. 하지만 회의 이후 나온 공동 성명에선 그에 관한 내용이 쏙 빠졌다. ‘체포영장 집행은 불가하다’는 미국의 강경한 주장을 다른 참가국들이 사실상 수용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그간 국제사회에서 ICC의 권위를 옹호하는 데 앞장서 온 프랑스의 태도가 특히 눈길을 끈다. ‘네타냐후가 프랑스 땅을 밟으면 그를 체포하겠느냐’는 질문에 프랑스 외교부는 가부를 명확히 하는 대신 국제법 이론을 제시하며 얼버무렸다. 이스라엘은 ICC 협약 당사국이 아니란 점, 세계 모든 나라 정상은 외국에서 면책 특권을 누린다는 점 등을 들어 ‘현실적으로 체포는 어렵다’는 취지의 견해를 밝혔다. ‘그럼 푸틴이 프랑스에 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도 프랑스는 ‘푸틴 또한 네타냐후와 같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ICC가 실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강대국이자 EU의 리더를 자처해 온 프랑스의 언행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몽골 정부가 푸틴을 체포하지 않았을 때 EU가 “ICC 협약 당사국으로서 의무를 불이행해 유감스럽다”고 비난한 점을 감안하면 완전히 적반하장 아닌가. ICC를 종이호랑이로 전락시킨 것은 ICC 자체가 아니라 이 국제기구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나라들의 비겁함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