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8월 부산에서 인류사에 남을 큰 결정이 나올 뻔했다. 4년 주기의 세계지질과학총회가 벡스코에서 열렸는데, 여기서 현 시기를 ‘인류세(Anthropocene)’라고 공식 규정하는 결정을 할 수도 있다는 추측이 지난해부터 강력하게 나돌았다. 지질시대 명명 권한이 있는 이 총회에서 예상대로 결정됐다면 “부산 총회에서 정해진 인류세”라는 표현이 전 세계 언론과 지구과학 교과서에 마르고 닳도록 언급됐을 것이다. 그런데 총회 몇 달 전 열린 전문가 회의(층서위원회)에서 66%의 반대로 부결됐다. 이걸 아쉬워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안도해야 할지….
지질연대는 화석으로 구분한다. 지구 환경에 큰 변화가 생기고 그로 인해 땅에 묻힌 시대의 흔적(화석이나 퇴적층)이 이전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면 하나의 시기로 규정된다. ‘~대, ~기, ~세, ~절’ 식으로 세분류하는데, 현재는 ‘신생대 제4기 홀로세(Holocene)’라 부른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1만1700년 전부터 별다른 변화 없는 온화한 기후 속에서 문명이 꽃핀 시기다.
8월 부산서 인류세 도입 선포될 뻔
지구 온도 1.5도 상승, 임계점 눈앞
트럼프 재당선으로 가시밭길 예고
홀로세를 종료하고 새로운 시대를 규정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진 것은 그만큼 지구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다. 이전까지의 변화는 화산 폭발이나 소행성 충돌, 대륙이 갑자기 합쳐지는 지각변동 등 자연과 우주 현상이 촉발했다. 하지만 이번 시대의 변경은 인류 활동의 결과다. 지표에 플라스틱과 콘크리트가 뒤덮이고, 기온이 급격히 변화하며 종이 급속히 줄어드는 양상이다. 인류세 논의는 단순 해프닝이 아니라 확고한 흐름이다. 출발 시점을 첫 핵실험 몇 년 뒤인 1950년으로 하는 것에 대한 증거의 보강 정도만 남았다고 한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인류세의 종료 시점이 지나치게 빨리 올 수도 있다는 예측이다. 백악기 말 공룡이 멸종했듯, 그 끝에는 대표 생물종을 포함한 대멸종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 행성의 대표 생물종은 한가롭기 짝이 없다.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2주간 진행된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 29)가 어제 새벽 막을 내렸다. 폐막 예정 시간을 하루 넘기며 밤샘 논의를 하고 나서야 간신히 합의문을 도출했다. 기후변화로 피해를 본 나라와 개발도상국을 돕는 기금을 연간 1조3000억 달러씩 조성하고 이 중 선진국 몫을 연 3000억 달러(약 421조원) 이상으로 하기로 합의를 봤다. 5000억 달러 이상으로 하자는 개도국의 요구와 2500억 달러 이상은 어렵다는 선진국 입장을 절충한 결과다. 사실상 이게 전부다.
개막 직전 세계기상기구(WMO)는 올해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혁명 전보다 1.54도 올랐다는 내용의 ‘지구현황 보고서’를 제출했다. 과학자들은 지구 평균기온이 1.5도 이상 오르면 회복 불가능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고 한목소리로 경고해 왔다. 물론 30년 이상 장기 평균이기에 올해 나타난 기온 변화가 일시적 현상일 수 있지만, 그 임계점에 바짝 다가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후변화를 다루는 최고 회의에서조차 긴장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개별 나라들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전쟁이 지구촌을 휩쓸며 비관적 전망이 커지고 있다. 당장 생존이 문제인데 불확실한 지구의 미래를 생각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 임기 때 파리협약을 탈퇴했던 트럼프가 다시 당선된 것도 가시밭길을 예고한다. “기후 위기는 사기”라는 신조를 가진 그는 보란 듯이 에너지 장관에 화석연료 채굴회사 CEO를 내정했다. 그러니 선진국 부담금의 상당 부분을 미국이 떠안을 것이란 기대는 난망이다. 조약을 깨지 않으면 다행이다. 국제적 협력은 점점 더 멀어져간다.
반면에 기후 재앙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달 말에도 스페인에서 대홍수가 발생해 220여 명이 숨졌다. 올해는 세계적으로 홍수가 홍수다. 한국의 여름은 혹독했다. 지난해 초록 단풍에 이어 올해는 지각 단풍에 색채도 영 시원치 않다. 이런 단풍이나마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정상적인 기후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