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국외연수로 독일에 한 학기 머물 동안 며칠 말미를 얻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다녀온 적 있다. 여행의 목적은 하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을 보는 것이었다.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설계로 초석이 놓인 후 140년 넘도록 축조 중인 가톨릭 성당. 내가 가톨릭 신자임을 아는 선배 선생님이 연구학기 중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가보라 권하며, ‘형언할 수 없음’이 어떤 감정인지 거기 가보면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방문의 계기였다.
한밤에 바르셀로나역에 도착해 인근 숙소에서 눈 붙이고, 다음날 일어나 성당을 찾았다. 사진으로만 본 옥수수 모양의 종탑들이 저편에 나타나면서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지도상 성당이 오롯한 모습을 드러낼 지점이 가까워지니 심장이 쿵쾅쿵쾅했다. 골목을 돌자 과연 어마어마한 것이 시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당황했다. ‘웅장하다’가 아닌 ‘그로테스크하다’가 솔직한 첫인상이었기 때문이다. 전면이 곡선으로만 이루어진 건물은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생명체 같았는데, 불경함을 무릅쓰고 고백하면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한 ‘오물신’을 연상케 했다. 무단투척한 폐기물이 맑은 물길에 박혀 들어, 커다란 몸에서 오물이 흘러내리는 강의 신. 가까이 다가가 ‘탄생’ ‘영광’ ‘수난’을 주제로 한 조각들을 찬찬히 살피어도 감동은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출입문 중 하나에 삼각형 문양을 이루며 반복적으로 새겨진 ‘거룩하시도다(Sanctus)!’에선 경건함 대신 강퍅함이 묻어나는 듯했다. 가우디의 작품세계에 감응 못한 자의 사적인 감상으론 그랬다.
그렇게 외벽을 따라 돌다 입장 시간에 맞춰 안으로 들어섰다. 성당의 내부는 뜻밖에도 외양과 전혀 다른 온도와 채도를 품고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여과한, 흐르는 물처럼 투명한 빛이 공간을 채웠다. 안온한 품에 안긴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 와보았음에도 익히 아는 장소 같았다. 이 익숙함이 무엇일지 의아해하다가 다음 순간 감지했다. 여긴 바로 내 안의 내밀한 곳이구나. 그로테스크하고 강퍅하며 비대해진 자아의 외벽 너머 깊숙한 데에 마련된, 오로지 신만 알고 있을 비밀 처소구나. 몸이 떨려왔다. 모아쥔 두 손 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사랑을 몰랐다. 희소하고 각별한 관계를 지켜내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단 한 번도 한 존재를 충만히 사랑해내지 못했다. 성실히 공부하며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실상은 연구자의 자의식은 과잉되되 막상 연구성과는 대단치 않고, 교육자적 애착은 강하나 강의는 멋지게 못하는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향한 미움이 내면의 물길에 박혀 들어 거대한 오물신처럼 돼버린 자아를 지닌 채 날마다 매일의 일은 했다.
온전히 이해 못한 이론을 한층 난해한 서술로 뭉개고 싶은 유혹과 싸우며 한 줄 한 줄 글을 써나갔다. 학생의 과제물에서 반짝이는 지점을 발견하고 설명을 보완하려 수업자료를 다시 만들었다. 사랑할 줄 모르면서 택시 기사님과 귤 몇개와 빵 한 덩이를 나눴고, 카페 옆자리에서 울다 말고 화장 고치던 사회 초년생을 연민했고, 단골 도넛 가게 점원분과 시간의 선물을 주고받았다. 그런 순간이 더하고 더해져 빚어냈을 테다. 투명한 빛으로 채워진 비밀 처소를. ‘슬픔과 불안과 절망과 수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고 무엇도 침범하거나 더럽힐 수 없을’ 내 안의 성전을.
나를 미워하거나 혹은 내가 미워하는 사람 내면에도 그런 처소가 있겠지. 그 상상은 도움이 되었다.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데에. 언젠가 도래할 우리의 세상 끝날, 안온한 품에 들어 폭 안길 수 있길 소망한다. “다시 일어나라. 그래, 내 영혼은, 넌 단숨에 되살아나리니. 네가 투쟁해온 그것이 너를 하느님께로 데려가리라.”(말러 교향곡 2번 ‘부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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