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친 파도가 배를 뒤흔들고, 귀하신 승객들의 절규가 천둥처럼 울려퍼진다. 절체절명의 순간, 폭풍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그 유명한 대사가 터져 나온다. “지옥은 비었을 거야. 모든 악마가 다 이리로 왔으니까.”
국립극단이 올해 마지막 작품으로 올리는 <태풍>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희곡으로 유명한 <템페스트>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극은 공주를 결혼시키고 오는 나폴리의 왕이 탄 배가 폭풍우에 휩쓸리며 시작된다. 이 폭풍우는 사실 동생이 나폴리 왕과 결탁해 밀라노를 빼앗긴 전 밀라노 대공의 마법이다. 동생의 배신으로 딸 미란다와 쫓겨난 그는 외딴섬에서 12년간 마법을 배우며 복수의 때를 노린다. <태풍>은 결국 복수 대신 용서와 화해를 택하는 이 이야기에 따스함과 유머를 더해 한결 부드러운 바람을 객석으로 불어보낸다.
장면이 전환되면 외딴섬. 바닥을 덮은 짙은 이끼와 부드러운 풀밭 사이로 들꽃과 갈대가 피어있다. 이 고요한 은신처의 한 켠에 도톰한 가운을 입고 텀블러를 손에 쥔 백발의 여성이 앉아 있다. 지난 세월을 견디며 마음의 격랑을 내려놓은 그의 이름은 프로스페라. 폭풍으로 나폴리 왕과 동생 일행을 섬으로 끌어들여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태풍>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원래의 성별 설정을 바꾼 ‘젠더 벤딩’이다. 원작의 밀라노 공작 ‘프로스페로’와 나폴리 왕 ‘알론조’를 여성으로 설정해 각각 ‘프로스페라’와 ‘알론자’로 재구성했다. 남성 권력자였던 인물들이 여성으로 전환되며 서사는 용서와 화해에 무게 중심을 두고, 가부장적 관계는 모성과 자매애, 여성들의 연대로 전환된다.
프로스페라를 연기하는 예수정 배우는 텀블러에서 따뜻한 커피를 건넬 것만 같은 할머니처럼 친근하지만, 시선을 뗄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자신의 수하인 ‘에어리얼’과 농을 주고받는 그는 대적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대신 고난을 통해 새사람이 되도록 이끈다. 태풍의 진노 대신 태풍이 지나간 뒤의 평화를 택한 셈이다.
긴장을 내려놓고 미소 지으며 볼 수 있는 <태풍>은 송년에 어울리는 공연이다. 박정희 연출은 다음과 같이 연출의도를 전했다. “삶의 어느 순간, 우리는 각자의 바다 한가운데서 거센 파도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권력과 배신,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뒤엉킨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 그녀의 용서는 세상을 되살리고,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시키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힘이 됩니다.”
모든 계획이 완성되는 순간, 마법 지팡이를 내려놓은 프로스페라는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여러분께서도 늘 용서 받으시듯이, 여러분의 즐거움이 절 풀어주시기를” 명동예술극장에서 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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