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커뮤니티에 없는 것들 : 대화와 안전한 수치심

온라인 커뮤니티에 없는 것들 : 대화와 안전한 수치심

The Age of Vanished Interaction Rituals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160), 2025.7.2,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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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의례, 커뮤니티, 자아, 수치심, 공동체의 규모

1.머리말

2.‘대화’가 없다 : 나와 너가 사라진 공간

3.‘수치심’이 없다 : 안전한 수치심, 배움의 부재

4.우리에겐 ‘적당한 규모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지난 19일, ‘일베(일간베스트) 폐쇄’에 찬성하는 11만명의 서명이 대통령실로 전달되었습니다.(링크) 이는 지난 4월부터 이어진 ‘일베 폐쇄 10만 서명운동’의 일환으로, 특히 대통령 선거 이후 서명이 급증했다고 합니다.

몇 년 만에 일베 폐쇄 주장이 다시 수면으로 올라온 이유는, 계엄 당시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가 극단적인 주장, 테러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인데요.

19일 청년진보당 전국대학생위원회 등이 11만여명의 서명을 대통령실에 전달했다고 합니다. (왼쪽) 사람들은 심심할 때면 때때로 '소통'을 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들여다봅니다. 그중에서도 익명성 기반의 커뮤니티는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얻거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들르는 곳이죠. / 진보당 공식 X, Unsplash

저 역시 커뮤니티의 혐오발언 등 문제의 심각성에는 공감을 하며, 대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곰곰 생각했습니다. 과연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커뮤니티가 있기 때문에 커뮤니티를 없애면 해결되는 문제일까요? 단순히 표현의 자유 같은 얘길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예전부터 저는 커뮤니티에서 혐오 얘길 일단 빼놓고 보더라도, 거기서 만족스럽고 의미있는 소통들이 일어나고는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었습니다.

*

사실 우리는 오늘날 ‘소통’을 그저 정보를 주고받는 것 정도로 생각하곤 하는데요.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벌어지는 일이 소통이라고 한다면(심지어 말이 아니라 눈짓, 지나침도) - 우리의 삶은 수많은 소통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직간접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부대껴 살아가며, 남의 삶을 구경하고, 또 나의 삶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위험을 감수하기도 하고, 실수를 했다가 교정받기도 하고, 신나는 대화를 하기도 하고, 뚱딴지같은 우연을 마주해서 자기 삶의 목표를 바꾸게 되기도 하죠.

즉, 인터넷 커뮤니티를 무조건 배척할 필욘 없지만 - 오늘날 우리가 많은 시간을 쏟는 그 공간에서 과연 ‘기분좋고 의미있는 소통’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해왔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이유는 과연 현실과 동떨어져있는 것인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도요.

그리고 어쩌면 혐오나 문제발언 그 자체보다도 ‘익명 커뮤니티 공간의 소통’이라는 측면에 집중해서 해찰해보았을 때, 오늘날의 소통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늘 레터에서는 <상호작용의례>(어빙 고프먼), <수치심의 힘>(제니퍼 자케), <지의 관객 만들기>(아즈마 히로키) 등을 지팡이 삼아, 커뮤니티와 소통에 대해 해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대화가 없다 : 나와 너가 사라진 공간】

“존중의 결여는 드러내놓고 하는 모욕보다는 덜 공격적이긴 하지만 똑같은 상처를 줄 수 있다 [...] 상대방은 보이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의미를 갖는 온전한 인간이 아닌 것이다 [...] 먹을거리와 달리 존중에는 아무 비용도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왜 존중이 공급 부족에 시달려야 할까?” - 리처드 세넷

“온라인 커뮤니티엔 대화가 없다”

어리둥절해질 수 있는 문장입니다. 커뮤니티에는 한 시간 안에도 수백 수천개의 ‘말’들이 활발하게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만약 우리가 대화를 통해 단순히 시간을 때우거나 내 삶에 큰 관련도 없는 사람을 놀리며 즐거워하는 것 정도 뿐 아니라, 삶에 진짜 영향을 줄 만한 우연을 맞이하고, 나의 사회적 자아를 만들고, 진지한 소속감을 갖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대화는 모두 같은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 과연, 오늘날 대부분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일어나고 있는 ‘존중 없는 소통’은 “얼마나” 소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상호작용의례>(1967)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소통하는 방식과 의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람이 서로를 존중하는 법부터 시작해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다양한 내용을 아우르는 핵심 메시지는 존재합니다.

그건 바로, “말(소통)이라고 해서, 다 같은 말이 아냐!”라는 거죠.

어떤 사람들과,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느냐에 따라 소통의 질과 양상은 천차만별로 다르고요. 그 상황의 존중과 주고받음의 ‘수많은 조그만 우연과 노력’들이 모여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소통을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미국 사회학자”라고 불리며 <자아 연출의 사회학> 등을 통해 의사소통에 대해 연구해온 어빙 고프먼(1922~1982·링크) (왼쪽) 그가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쓴 6편의 에세이를 모은 <상호작용 의례>(1967) 책 표지. 대면행동에서의 다양한 양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The University of Edinburgh, 아카넷

고프먼에 따르면 제대로 된, 의미있는 소통을 만들기 위해서는 의례와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 모두의 섬세한 노력이 필요하죠.

* (세상에는) 문화가 달라 예의에 어긋난 행실을 보이는 건방진 사람, 별난 사람, 버릇없는 사람, 사나운 사람, 유명인사, 중독자, 노인, 젊은이들이 있는 법이다 […] 나는 구두 의사소통이 가능한 경우는 오직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의례적으로 잘 규정된 관계를 맺고 한 동아리가 되어 서로를 대화집단으로서 생각할 수 있을 때뿐이라고 주장한다.

*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함께 있는 상황이 되면, 서로를 독특한 방식으로 대하게 된다. 신체적, 성적 폭력이 벌어질 수도 있고, 내키지 않는 대화에 말려들 수도 있다 […] 상대의 민감한 자아영역을 건드릴수도 있다 […] 대면상황의 품행규칙은 특정 공동체에서 서로 융화되는 모습을 연출하여 일종의 제왕의 평화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빙 고프먼, <상호작용의례>(이하 동일)

그 핵심은 무엇보다도 나와 너에 대한 존중(의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익명 기반의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대체로 둘 다 없습니다.

*

진정한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하기 위한, 두 요소를 조금 더 파고들어보겠습니다.

ㄱ.‘나’의 문제 - 체면(face)의 존재 : 나에게 ‘돌볼 체면’이 있는가?

ㄴ.‘너’의 문제 - 상대를 존중하는 것 : 상대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

ㄱ. 우선 ‘체면’의 존재입니다.

고프먼이 말하는 체면이란, 일종의 ‘추구미*를 추구하는 멋진 나’ 비슷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추구미 = '추구(追求)'에 美를 더한 신조어로, 내가 되고 싶은 이미지, 지향하는 롤모델 등을 뜻한다.

단, 막연히 내가 되고 싶은 ‘이미지’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만약 상대방이 그것을 인정해줄 때 기뻐지는 ‘자아상’에 가깝죠. 예를 들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친절한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기 때문에 평소 다른 사람들을 성심껏 돕기도 하고, 용감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무모한 도전을 하기도 합니다.

체면이 오르면 기뻐하고, 체면이 상하면 크게 주눅들고 실망하죠.

체면(face)이라는 말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는 동안 그들이 짐작하는 노선대로 자기를 표현하여 얻게 되는 긍정적인 사회적 가치라 정의할 수 있다. 체면은 개인이 남들의 인정을 받을 만한 사회적 자질을 지닌 존재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자아 이미지인 셈이다 […]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체면에 즉각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체면을 소중히 여긴다. 체면에 ‘감정’도 실린다 […] 예상보다 좋게 ‘체면을 세울만한 사건이 생기면 ‘기분이 좋아’진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기분이 나쁘고’ ‘마음이 상한다’ […] 그뿐만 아니라 다른 참여자들의 체면에 대한 감정도 있다 […] 즉, (의례란) 체면에 대한 감정, 그리고 관련된 다른 사람들의 체면에 관해 감정을 얼마나 느끼고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집단의 규칙이자 상황 정의인 것이다.

이런 대목을 읽다보면, 어쩌면 인생이란 체면을 적극적으로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모든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실제로 우리는 일상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런 ‘체면’을 지키는 방식으로 일관되게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그런데 익명성이 기반이 되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우리는 일상에서와는 달리 대체로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체면을 벗어던질 수 있다’는 건 과연 완전 기쁜 일일까요?

우리는 통상 ‘체면’을 번거로운 것, 내던지면 좋을만한 ‘족쇄’처럼 여기곤 하지만, 고프먼에 따르면 체면을 내던지는 건 결코 홀가분하기만 한 일이 아닙니다. 체면은 단순히 우리를 옥죄기만 하는 게 아니라 긍정적인 자아상을 만들고,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나’만 있을 때는 불가능했을 숭고한 헌신과 도전을 해내기도 합니다.

심지어 고프먼은 ‘체면’은 일종의 기쁨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죠.

어느 경우에 해당하든, 사회적 체면은 가장 개인적인 소유품이자 안정감과 기쁨을 주는 핵심 요소지만 사회가 빌려준 것이기도 하다. 빌린 사람이 지키지 못하면 사회가 거두어간다.

좀 알쏭달쏭 할 수 있습니다만, 요는 익명 게시판에서는 애초에 내가 아무리 ‘추구미’를 위해 노력하더라도 누구도 나를 ‘김스피’ 개인으로 봐주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일관되게 좋은 일을 하고, 내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도전, 노력할 유인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마구 엉망으로 굴 수 있겠지만, 그건 딱히 저에게도 기쁜 일이 아니라는 거죠.

*

ㄴ.이어서, 상대에 대한 존중입니다.

이 역시 우리는 통상 ‘의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상대를 존중하기 싫은데 억지로 어쩔수없이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고프먼에 따르면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에서 진심으로 내가 인정받기를 원하는 만큼이나, 상대방을 존중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고 합니다.1)

심지어 우리는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장면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데요. (대표적인 예로, 버스 기사들끼리 스쳐지나며 눈인사하는 장면 등)

일반적인 대면 소통에서 우리는 상대방을 웬만해서는 모욕적으로 대하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우리가 만족감을 위해서는 상대방의 인정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죠.

* 타인과 함께 있으면 항상 개인은 좋은 처신으로 자신을 잘 다잡아야 함을 상기하고 타인이 성스러운 존재임을 확인한다.

* 사회관계의 전형적 의무는 주어진 상황에서 서로 상대의 체면이 유지되도록 보장해주는 일이다 […] 모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얻는 바가 많으니 서로의 체면 유지에 협조하는 것이다 […] 사람이 보호하고 방어하고 감정을 쏟는 것은 자신에 대한 관념이다.

반면, 이 경우도 익명 기반 커뮤니티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입니다. 왜냐면 모니터 속 상대방이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방식으로 소통이 일어나기 때문이죠.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차를 탄 상대방을(특히 창문의 썬팅이 강할수록 더더욱) 상대적으로 '인간'으로 인식하기 어렵고 분노하기 쉽다고 합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어쩌면 인터넷에서의 소통도 비슷할지 모릅니다. (왼쪽) 강아지가 컴퓨터 앞에서 다른 강아지에게 말합니다 "인터넷에서는 아무도 네가 개란 걸 몰라!" 1993년 <뉴요커>에 실린, 인터넷의 익명성을 보여주는 유명한 만평(링크)이죠. 인터넷 초기엔 이런 익명성이 보통 '해방'의 의미에서 주목되곤 했지만, 사람들은 상대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소통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 Unsplash, Newyorker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나만 남을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남도 나를 똑같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존중은 상호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가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공간에서는 타인 역시 나를 존중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이런 경우 위에서 보았듯, 진정한 인정과 대화가 일어나기 어렵죠.

하지만 이런 진정한 대화는 우리에게 대체하기 어려운 진정한 기쁨을 주기 때문에, 단념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2)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지적한대로, 개인은 자기의 관심사, 느낌, 흥미를 다른 사람들이 몰입할만한 가장 효과적인 이야깃거리로 구사해야 한다. 또한 상호작용자로서 개인의 의무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기대에 공감하고 호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라고 요구할 권리와 균형을 이룬다. 상대의 능력과 요구를 감안해 말하는 사람은 표현의 수위를 낮추고 듣는 사람은 관심의 수준을 높인다.

이 두 경향이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사람들은 상호몰입으로 교감하는 대화의 순간을 경험한다. 세상을 밝혀주는 것은 바로 이런 불꽃이지 너무 뻔히 보이는 사랑같은 것이 아니다.

저는 이 대목을 곰곰 읽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는 느낌이었는데요.

이런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선 거창한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기 위해 아주 간단한 의례를 지키면 됩니다. 우리가 지키기 때문에 비로소 의미있는 소통이 가능한 것입니다. 마치 신호등이 있기에 우리가 편리하게 걷고 또 차를 탈 수 있는 것처럼요.

의례는 짧고, 비용도 들지 않고,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참여자들이 의례적 의무와 기대의 준수를 통해 관용을 주고받는 지속적 흐름이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 [...]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개인이 처신을 잘하고 존대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이런 의례는 거의 실종되어 있는 상황입니다.3)

1) 쉽게 말해, 대면 상황에서 사람은 웬만해서는 자기 눈 앞의 사람을 '인간 이하'로 바라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본능적으로요. 이 때문에 전쟁, 불평등의 역사는 사실상 어떤 인간을 고의로 '인간 이하'(링크)로 바라보게 하기 위한 제도적 시도, 신념 만들기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소설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이 책에서 주인공은 적을 죽이기 위해 한사코 상대방 프랑스군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했고, 그의 지갑에서 그의 가족사진과 명함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습니다.(결국은 보게 되지만요) 오늘날엔 인터넷에서 누구나 함께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곤 하지만, 사실 너무 간단하게 나와 다른 존재들을 '쳐다보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는 '쳐다볼 수 있다'는 착각과 함께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적이기도 하죠.

2) 예전 레터(링크) 중 17~18세기 무렵 영국 '커피하우스'에서의 대화의 기쁨을 나타난 대목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당시 커피하우스와 관련된 문헌 가운데는 이처럼 몇시간의 대화에 크게 만족스러워하고 기뻐하는 대목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 레터에 인용했던 대목 중 일부입니다.

"1660년 겨울 피프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날 저녁 처음으로 콘힐에 있는 커피하우스에 갔다. 그곳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너무도 즐거웠다.”[...] “코벤트 가든에 있는 톰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두시간을 보냈다[...]제대로 잘 말한 것 같다. 오늘처럼 이성적인 대화를 나눈 게 언제쯤이었는지 모르겠다 [...] 터무니없는 감정을 토로하거나, 무절제하게 웃지 않았던 것은 낯섦에서 비롯된 거리감 덕분이었다.” - 매튜 그린, <영국 커피하우스, 그 찬란한 세계>

3) '모든' 인터넷 커뮤니티가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기본적으로 제대로 된 의미있는 의사소통을 위해선 상호존중을 위한 최소한의 '규칙/의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핵심입니다. 실제로 과거 레터에서도 다루었던 <디베이터>(링크)에서 서보현은 제대로 된 토론의 핵심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엄격한 규칙이라고 강조한 바 있고요. 제론 러니어는 같은 인터넷 공간이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서로를 존중하고, 자신의 연속된 자아(체면)를 표현하게 하느냐에 따라 소통 방식은 천차만별로 차이가 난다고 꾸준히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어리석은 짓을 하는 건 정확히 익명성 때문이 아니라 일시적인 익명성과 그에 따른 결과의 결여가 합쳐져 일어나는 현상이다…차이가 있다면 세컨드라이프에서는 가상의 성격 자체가 매우 귀중하며 그것을 구축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떄문일 것이다.-재런 러니어, <디지털 휴머니즘>

【3.수치심이 없다 : 안전한 수치심, 배움의 부재】

이상 살펴본 것처럼, 말은 단순한 정보나눔이나 소일거리가 아니라, 아주 섬세한 규칙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고요. 좋은 소통을 통해서 우리는 자아충족감과 경청받는다는 즐거움, 존중받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삶의 만족감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죠.

이어, 익명 기반 인터넷 커뮤니티 소통에는 또 없는 것이 있습니다. 수치심입니다.

수치심은 통상 피해야할 부정적인 감정으로 여겨지지만, 아주 효율적인 방식으로 공동체의 가치와 소통의 규칙을 몸소 배울 수 있는 유용한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를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한 짧은 일화가 있는데요. 롤랑 바르트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어느날 이토 지역에 갔다가, 일행 중 한명이 현지인 청년 상인을 대상으로 다소 무례한 장난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일행은 청년을 모욕할 목적으로 ‘잡지를 보여주는 장난’을 쳤지만, 그 순간 청년은 오히려 상대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되 동시에 그가 무례한 일을 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수 있을 정도의 단호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죠. 그 찰나의 분위기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습니다.

이토에서, 매우 광활하고도 고상한 경치가 눈앞에 펼쳐지는데,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장난으로 (장난이라는 것을 어찌나 강조하는지) 여자 나체 사진 한 장(<플레이보이>인지 뭐 그런 잡지에 실린)을 귀한 돌을 팔고 있는 젊은이 모하에게 건넨다.

그 청년은 미소, 다소곳한 태도, 진지한 모습, 그리고 거리 두기.

처음엔 그를 놀려먹으려고 꾸민 일이건만 도리어 그가 이 장면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상대방 남자의 히스테리만 그대로 남음.

-롤랑 바르트, <소소한 사건들>

(*괄호 표현은 본문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짧은 메모글들로 이루어진 책이라 표현이 간략한 편입니다)

이때 이 눈 앞에 놓인 강렬한 ‘표정’과 주변의 분위기로 인해 당사자는 ‘머쓱’해지고 ‘수치심’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이 강렬한 부끄러움의 감각은 교사나 부모가 ‘일방적으로 붙잡고 가르친다’고 해서 주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통과정에서의 피드백, 교정을 통해 가능한 것이죠.4)

하지만 오늘날 인터넷에서 이런 교정이 불가능한 이유는, 한 개인이 ‘안전한 수치심’을 느낄만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사소한 잘못은 지나치게 위험성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굳이 서로 관여하지 않기로 한 사회적 분위기도 영향이 있고요.

*

제니퍼 자케는 <수치심의 힘>에서 수치심을 낯선 방식으로 바라보는데요.

이 책의 핵심 메시지를 한줄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적절한 수준의 수치심은 사회 구성원들(개인/기업/집단 등)이 실수를 바로잡고 올바른 길로 향하는데 도움이 된다!”

사실 모든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고요. 아주 범죄의 영역이 아니라면 - 우리가 약간의 수치심을 통해 자신의 언행을 바로잡고, 사회적으로 권장되는 방식의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매번 사소한 잘못을 할 때마다 구성원들을 너무 강하게 벌하거나, ‘손절’하면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할테니까요. 적절한 수치심을 가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기후와 환경, 수치심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온 제니퍼 자케(마이애미대 환경과학 교수, 브라운대 기후사회과학네트워크 부소장) (왼쪽) <수치심의 힘>의 영어판 표지 / Chatham house, Amazon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오늘날 인터넷 환경에서 ‘안전한 수치심’을 가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졌다는 겁니다.

과거엔 작은 실수나 민폐가 대면 관계 안에서 일시적으로 일어나고, 교정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오늘날엔 단톡방이나 SNS에 올라온 글마저도 언론이 합세해 ‘공론화’가 됩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만약 소규모 공동체라면 적당한 수치심을 통해 교정 가능한 정도의 잘못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는 거죠.

* 디지털 수치주기는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빈번하게 그리고 악의적으로 사용된다. 네티즌에 의한 수치주기에는 불균형 문제가 동반될 수밖에 없다. 소소한 위반행위라도 동영상으로 찍혀 유포되면 그렇지 않은 중범죄보다 더 큰 처벌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 고양이를 쓰레기통에 넣은 저 여자를 찾아주세요”

* 수치주기 전략에 따르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위반자를 사회에 다시 편입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고립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주홍글씨는 “정상적인 인간관계에서 떼어내어 그녀만의 세계에 가두는, 마법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이렇게 고립을 당하면 위반자는 집단의 일원으로 살아가기보다는 계속해서 위반자로 살아가는 것이 더 편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 수치주기는 누구의 삶도 무너뜨리지 않고 효과를 발휘할 때, 투쟁-도피 반응이 아닌 개혁과 재통합을 이끌어낼 때, 그보다 더 이상적으로는 나쁜 행동을 억제하는 역할을 할 때 최적의 성과를 내는 셈이다 […] 수치에 대한 두려움은 개인 또는 기관들로 하여금 집단이 용인 가능하다고 여기는 행동을 따르도록 만들 수 있다. 수치는 집단에 복무하는 것이며 적시에 적절하게 사용하면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

-제니퍼 자케, <수치심의 힘>

인터넷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조금이라도 잘못된 일을 했을 때 이를 굳이 번거롭게 교정해줄 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마구 비난하는 것, 그래서 그 사람을 매장하는 것만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거죠.

또한, 기본적으로 수치심이 ‘체면을 잃는 것’이라고 할 때, 익명 커뮤니티에서는 사소한 수치심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앞서 살펴봤듯 익명 커뮤니티에는 지켜야 할 체면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익명성은 든든한 자유의 방패라기보다는, 제때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의 행동을 교정하고 소속감을 얻지 못하게 하는 요소라고 볼 수도 있겠죠.

*

그런데, 생각해봅니다.

만약 이 모든 일이 ‘올바로’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즉 어떤 잘못이 발생했을 때 ‘안전한 정도의 수치심’을 가해서 공동체 내에서 배울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잠깐 앞의 책으로 돌아가, 어빙 고프먼은 <상호작용의례>에서 트러블을 해결하는 과정(‘체면 지키기’)을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는데요.

‘①도전 → ②제안 → ③수용 → ④감사’의 4단계입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나쁜 말이나 행동을 한 사람에게 누군가가 지적을 하고(①도전), 물의를 일으킨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를 주고 여전히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도록 손을 내밀면(②제안), 그것을 수용(③)하고 지적한 사람에게 감사(④)를 표하게 된다는 것이죠.

표준적인 수습과정에서 심각한 이탈이 일어나는 경우는 도전을 받은 사람이 잘못을 고치는 대신 공공연하게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무례하게 굴 때다. 그러면 도전자들에게 공이 넘어간다 […] 도전자(*문제제기한 구성원들)가 난폭하게 앙갚음을 해서 스스로 망가지든지 아니면 경고를 무시한 자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또는 […] 그 자리를 떠나는 방법을 택한다 둘다 무례를 저지른 사람은 상대할 만한 사람이 아님을 드러내고 사건이 벌어진 현실을 거부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체면을 살리는 대신 관련자 모두가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무례를 저지른 사람이 재빨리 사과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기 때문이다 […]

다른이의 체면을 손상한 데 대해 가책을 느끼거나 자기 체면이 망가져서 화가날 때는 감정의 순환작용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게 분명하다. 나는 감정이 조치를 취하게 만든다는 점, 그리고 감정작용은 의례 게임의 논리와 너무나 잘 들어맞기 때문에 감정적용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수습조치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는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수준의 소규모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일이며, 동시에 구성원들이 그것을 아끼는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없다면, 이런 교정 과정(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진정으로 사과를 요구하고, 제안하고, 받아들이고 다시 친하게 지내게 되는 일)은 불가능할테니까요.

그리고 어빙 고프먼은 무엇보다도 - 이런 교정 과정은 단지 팩트를 주고받고 단죄하는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라, “감정의 순환작용”이 중심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때, 나처럼 남을 존중하려고 할 때 일어나는 감정들이죠.

4) 이 때문에 어떤 장소(공공장소, 교실 등)에서 누군가 혐오발언 등 문제행동을 할 때,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건 나빠!'라고 내용적으로 제지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의례'를 어긴 행위이며 발언자의 '자아'에 불리한 영향을 준다는 시그널을 주는 것이 사실은 더 효과적이죠. 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요는 '용감한 자아'를 연출하고 싶은(어빙 고프먼) 사람에게 그 행동이 '찌질하다'는 시그널을 주는 식으로요. 그런데 보통 (특히 교실 등) 동료들이 있는 공간에서는 그가 신경쓰고 존중하는 '청중'은 혐오의 대상이 아닌, 자신과 문제행동을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에 국한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지를 고민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혐오 발언 등의 '문제행동'을 '내용'이 아닌 '의례 위반'의 차원에서 살펴본 대목은 아래 <참고문헌> 등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4.우리에겐 ‘적당한 규모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실은 이 모든 일은 상당부분 서로에게 애정을 쏟지 않는 공동체, 익명의 공간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그런 곳에선 의례, 존중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단순하게 <공동체의 모습을 바꾼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리는 없겠습니다. 다만, 저는 이를 시작점으로 삼아 상대를 의미있게 존중할 수 있는 다양한 소통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구체적으로 이런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고 그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의미있는 의사소통이 일어나도록 실험을 해온 사람의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해보겠습니다.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는 <지의 관객 만들기>에서 2013년 ‘겐론 카페’라는 공간을 만들고, 북토크, 토론, 토론, 온라인 강연 등 인문학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을 10년 넘게 운영해온 좌충우돌 역사를 책에서 쓰고 있는데요.

제가 이 책에서 특히 주목했던 지점은, 그가 ‘유료화’를 단지 돈을 번다는 목적 외에도 ‘적당한 규모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그 안에서 진정성 있는 소통을 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을 가장 강조한 부분이었습니다.

요는, 감당 가능한 ‘사이즈’를 유지함으로써 제대로 된 소통이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죠.

<지의 관객 만들기> 일본어판 표지. 그는 2011년 겐론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출판, 강연, 커뮤니티 등을 다각도로 실험해왔습니다. (왼쪽) 겐론에서는 다양한 강연 등을 진행하고 있는데,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것 뿐 아니라 구성원 간의 커뮤니티 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 겐론

우선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 공간의 소통을 '거거익선'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더 많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과 이야기하고, 어떤 사이트의 이용자가 더 많고, 올라오는 글과 정보가 잔뜩 있을 수록 좋다는 것이죠. (그럴 수록 사이트 수익도 늘어납니다)

하지만 아즈마 히로키는 그 통념에 물음표를 띄웁니다.

<과연 정말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걸까?>하고요.

*

의례, 존중 없는 '잔뜩 크기만한 공간에서의 소통'은 두 가지 차원에서 문젠데요.

첫째.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없기 때문에 의미없는 말들이 많다는 것이고

둘째. 마음껏 우연을 누리는 자유로운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순서대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의미 있는 대화를 위해선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우선 겐론에서 운영 중인 유료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 시라스(링크)는 로그인을 한 유료회원이 아니면 댓글을 달 수가 없습니다. 통상 이런 '페이월' 정책은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의 수익성 차원에서만 바라보곤 하는데 그는 시각을 바꾸어 '적정한 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소규모의 믿을만한 공동체'라는 점에 포인트를 맞춥니다.

무료 포털에서는 아무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함부로 의미 없는 댓글을 다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최소한의 '제약'을 걸 경우 눈에 띄게 댓글란이 정화된다는 것이죠.

플랫폼을 무료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스케일이 크기 때문입니다. 겐론카페를 7년동안 운영한 경험에서 말할 수 있는 사실인데, 결제 금액이 소액이라도 스트리밍을 유료로 하면 악성 댓글 사태가 일어날 여지가 압도적으로 줄어듭니다 […] 말꼬리를 잡는 누리꾼은 애초에 한푼도 낼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 한편 유료로 하면 공적인 장의 발언이 아니라 '사적 공간의 대화’라는 인상을 받는 심리가 작동하는 모양입니다 […] 겐론카페가 독특하고 친밀한 공간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유료 스트리밍을 한 것입니다 […] 시라스는 코로나 사태로 잃어버린 오프라인의 ‘가까움’을 온라인에서 조금이라도 되찾으려는 것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저는 이런 대목을 읽으며 오늘날 뉴욕타임스 등 대다수의 매체들이 독자 댓글창 관리에 굉장히 공력을 쏟으며, 오프라인 독자모임 등을 개최해 의미있는 피드백을 공유하려고 시도하는 추세를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비대면·온라인에서 마치 아무런 관리/의례가 없어도 <자동으로> 유의미한 소통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엄청난 착각'에 빠져있지만 온라인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선 오히려 대면 소통보다도 훨씬 섬세하고 많은 규칙이 필요한 것입니다.5)

둘째. 개방된 온라인 공간에선 우연을 누리는, 위험을 감수하는 진정한 대화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인데요.

SNS 등에서는 한번만 발언하더라도 그것이 한순간에 박제되어 지구반대편까지 연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말을 아끼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들만 모이는 오프라인에서는 훨씬 더 바보같은 말이나, 마음속에서만 담아두었던 위험한 말들도 맘껏 해볼 수 있는 것이죠. 내가 내뱉는 어떤 말들은 실제로 '잘못된 것'일 수 있지만, 나에게 애정을 가지고 지적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 앞에서 ‘커뮤니티’라는 말을 썼습니다 […] 수업에서 분리된 강사와 학생의 관계가 있어야 비로소 수업이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술자리입니다 […] 겐론스쿨이 잦은 술자리로 유명합니다 […] 강사도 함께할 때도 많고 때로는 논의가 밤을 새워 이어집니다 […] 이렇게 끈끈한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겐론의 강점입니다.

저도 가끔 얼굴을 내미는데, 이런 자리에서 펼쳐지는 의사소통을 보면 역시 사람들이 물리적인 공간을 공유하는 게 중요함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온라인에서 대화하다보면 다툼으로 번지기 쉬운 문제도 물리적으로 가까운 장소에서는 선뜻 말할 수 있고, 이런 말을 해도 상대방이 그다지 상처입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저는 만나지 않아도 본질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현실을 보지 않는 환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적당히 서로 상처를 줄 수 있는’ 의사소통 환경이 작품 지도나 수강생 사이에서 일어나는 절차탁마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 이것은 어디까지나 학생이 자발적으로, 수업과 ‘관계없이’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 ‘관계없는’ 것이야말로 겐론스쿨의 본질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술자리를 갖는 것을 막지 않아요 […] 이 어중간함이야말로 지금 대학에서는 유지할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 최근에는 그 ‘귀찮은 인간관계’까지 포함하는 게 겐론카페라고 결론내렸습니다 […] 교육은 오배송*의 위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 오배송= 오배(誤配) - 잘못 배송된 우편/배달 실패를 뜻하는 단어로, 예측하지 못한 오독(오해), 우연한 만남-세렌디피티 등을 뜻함.

* 카페든 스쿨이든 제가 지금까지 강조한 것은 오프라인의 중요성입니다 […] 오배송은 오프라인 커뮤니티에서 훨씬 더 일어나기 쉽습니다. 이것은 사실 제가 대학원 시절에 전공한 자크 데리다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주장과 깊이 관계됩니다 […] 데리다는 말이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늘 ‘에크리튀르(문자)’라는 신체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배송은 신체 없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툭하면 신체의 존재를 잊어버려요 […] 데리다가 인간에게 이런 경향이 있으며 위험하다고 말하는데, 제가 겐론에서 하는 일은 그야말로 그 가르침을 따르는 면이 있어요.

이런 공동체를 만드는 건, 어쩌면 단지 개인의 <소통> 차원에서만 유효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의 사회를 상상하게 되는 단초가 될런지 모릅니다.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선 함께 토론하고 힘을 합하는 사람들의 북적북적함이 필요할테니까요.

✏️

“저는 인터넷에 ‘스케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한 차원에서 돈이 도는 세계’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100만명, 1000만명을 추구하지 않아도 1000명, 1만명의 ‘관객’을 가짐으로써 살아나갈 수 있는 세계를요 […] 저는 겐론을 ‘작은 회사’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활동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반자본주의적이며 반체제적이고 대안적인 미래를 연다고 믿고 있습니다.”

5)이와 관련해서는 과거 컨텐츠 모더레이터에 대한 레터(링크)에서 짧게 다룬 바가 있습니다. 을 쓴 사라 로버츠는 1990년대 인터넷 공간에 대해 설명하며, 당시 인터넷 공간이 '유토피아'처럼 여겨진 이유는 사실 '스크린 뒤에서' 엄청나게 헌신적인 자발적인 모더레이터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5.맺음말】

레터를 끝맺으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특히 온라인 소통에서는 상대를 ‘개미 취급’ 하곤 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개미만 있는 세상은 지루합니다.

내가 존중할 만한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심각한 ‘존중 결핍’에 시달리며 그 결핍감을 적대감, 혐오로 드러내는 것이 오늘날 현실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

오늘날 분야를 막론하고 ‘다시 오프라인으로’라는 흐름이 퍼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 현상을 비단 한 가지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겠지만, 저는 오늘 레터에서 살펴본 ‘진정하게 존중하고 존중받고 싶은 마음, 진정한 소통에 굶주린 마음’ 등의 요소가 두루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고민할 때, 오늘날의 ‘커뮤니티 문제(처럼 보이는 문제들)’ 역시 해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시작점은, 올바른 소통을 위해선 우리에게 존중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존중 없는 소통은 얼핏 나를 강하게 만드는 것 같지만 실상은 가장 외롭고 빈 껍질처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직시하는 일일 것입니다.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어빙 고프먼, 진수미 옮김, 『상호작용의례』, 아카넷, 2013.

-수용소, 카지노, 식당 등 일상의 다양한 맥락에서 일어나는 '미시적인 대화의 순간'을 천착해온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의 저서(1967)입니다. 1955년부터 1960년대에 쓰인 상호작용의례와 관련된 에세이 6편을 엮은 책이고요.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자아 연출의 사회학>(1956)을 비롯해 그의 평생 저작들을 관통하는 문제의식들을 잘 살펴볼 수 있는 대표작이기도 합니다. 해제 등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듯, 이미 그의 사상이 '고전화'되어버린지라 다소 기시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직접 붙잡고 읽어보면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책입니다.

상대적으로 더 많이 알려진 그의 저서 <자아 연출의 사회학>의 경우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연출하는지(꾸며내는지)'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책인데요. 예를 들면, 카페 알바를 할 때 손님들에게는 친절하게 웃지만 부엌에 들어와서는 잔뜩 투덜대는 식으로요. 얼핏 이런 '꾸며낸 가면'과 '진정한 자아'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프먼은 가면이 단지 '겉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말하진 않습니다. 체면/타인에게 보이고자하는 다양한 자아상들이 모여서 한 사람의 인격을 이루는 것이며, 사람들의 성격은 단독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각각의 상황에 맞추어 다른 사람/상황과의 교류 과정에서 발현된다는 것이죠. 이 때문에도 '상호작용의례'는 중요해지는데, 만약 한 사람의 의미있는 자아가 타인과의 소통의 과정에서 생겨난다면 의미있는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의례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죠.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오늘날 온라인 소통은 그것이 '온라인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차원을 넘어, 일단 의미있는 상호작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의례가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점을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참고로, 이 책을 읽다가 가장 '의미심장하게(이상하게?)' 느껴진 부분은, 의사소통에 있어서의 많은 실패는 사실 '내용'보다도 '의례 수행의 실패'로 해석해야 한다는 대목이었는데요.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오늘날 '혐오발언' 차원에서(내용) 문제시되고 있는 교실 등의 문제는 어쩌면 그 문제적인 '내용'보다도 '의례(부재)'의 문제로 해석해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관련 대목을 짧게 인용해봅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규칙들 그리고 정신이상자나 말썽꾼들이 체계적으로 저지르는 규칙 위반 자체를 의사소통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규칙과 규칙 위반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의 관계로 구성된 사회조직의 지침(과 교란)으로 보아야 한다.(p.158)"

제니퍼 자케, 박아람 옮김, 『수치심의 힘』, 책읽는수요일, 2017.

-책의 부제는 '약자들이 강자에게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본문에서 말했듯, 수치심이(죄책감이 그렇듯) 경우에 따라 어떤 사람이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우에 따라'인데, 지나친 수치심(낙인)은 해당 구성원의 삶의 의지를 꺾고 아예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낳게 하기 때문에(링크) 올바른 방식의 수치-주기가 필요합니다. 책의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주로 기업, 권력자 등의 잘못을 수치 주기를 통해 폭로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데요. 기본적으로 저자는 오늘날 인터넷 생태계에서 '개인'의 사소한 잘못이 지나치게 부풀려 '낙인찍기 스포츠'화되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저자의 말대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부분은, 보통 수치심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는 '최상층'과 '최하층'이라는 것입니다. 최상층의 경우 수치를 당할 필요가 없게 시스템을 해킹할 수 있고, 반대로 최하층에겐 사라질 '체면'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 커뮤니티에서 혐오발언을 하는 게 모두 (경제적 의미의) '최하층'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 사회적 관계/체면의 차원에서는 소외된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빙 고프먼의 책에도 비슷한 맥락의 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이들을 '무시'하자는 건 중산층적인 전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피터 H. 킴, 강유리 옮김, 『신뢰의 과학』, 심심, 2024.

-이 책은 <수치심의 힘>과 함께 참고로 가볍게 읽어보면 좋을만한 책입니다. 제니퍼 자케의 핵심 주장과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지나친 수치심을 통해 구성원을 이탈하게 하는 방식보다는, 그의 실수/잘못을 품어주고 용서함으로써 잘못을 저지른 성원이 '회심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도덕적 위반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독특하게도 저자는 '용서를 해줘야 하는 입장'에서 책을 전반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데요. 책에서 지나치게 심각한, 명백한 범죄의 영역에 있는 것들과 기업의 실책 등을 같은 맥락에 섞고 있는 등의 한계가 보이긴 하지만,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내용 및 낯선 접근방식입니다.

아즈마 히로키, 지비원 옮김, 『지(知)의 관객 만들기』, 메멘토, 2025.

-이전 에세이회차 레터에서 간단히 소개했던 올해 신간입니다. 과거 레터에서도 몇번 다루었었던(<약한 연결> 등)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가 쓴 '경영전략서(?)'입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이 책이 경영전략서 코너에 꽂히기도 해서 인문서 독자 아닌 대중 독자들에게도 많이 읽혔다고 합니다)

굵직한 사상서, 소설 등의 출간으로 30대에 이미 일본 굴지의 비평가로 등극한 아즈마 히로키는 독특하게도 '상아탑'을 박차고 2011년에 '겐론'이라는 회사를 세워 출판사, 서점, 커뮤니티 등의 운영을 해왔는데요. 이 책은 어떻게 인문학으로 돈을 벌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지만, 한편 오늘 레터에서 다루었듯 어떻게 하면 오늘날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적절하고 의미있는 소통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책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 핵심은 본문에서도 간단히 다루었듯 헌신, 오배를 가능케하는 스케일(규모)과 현장성(오프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족을 좀 이어보자면, 책이나 글 역시 어떻게보면 '비대면 소통'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신간, 혹은 메일함에서 갓 온 뉴스레터를 읽는 일은 어쩌면 '비대면 소통'의 한계인 현장성/동시성을 어느정도는 상쇄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대면 소통이라고 할지라도 필자가 바로 쓴 글을 읽는 것은, 독자가 자신의 반응을 통해 모종의 '오배'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피드백을 통해서든 다른 기획을 통해서든...)

야콥 요한센, 김정은 옮김, 『온라인 청년 극우의 성차별, 인종주의, 여성혐오의 분석』, 학지사, 2025.

-최근 신간코너에서 우연히 제목이 눈에 띄어 읽은 책입니다. 30대 백인 고학력 진보적 성향의 남성이 쓴, 온라인 청년 극우에 대한 분석입니다. (굳이 책의 소개에 앞서 저자의 정체성을 소개한 이유는 그가 서문부터 그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간 우리나라에도 해외 저자들이 인셀 온라인 커뮤니티를 분석한 책들이 여러권 소개되어왔는데요.(링크1 링크2) 보통은 그간 온라인 인셀문화는 단면적으로 다뤄져온 감이 없잖은데, 이 책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단순히 여성을 혐오하는 것 외에도 여자 없는 삶을 지향하는 금욕적인 커뮤니티 등까지 다양한 층위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최근 SNS에서 논란?이 된 한 칼럼(링크)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기존의 책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처음보는 사례들을 함께 다루고 있었습니다.

이 책을 본문에는 활용하지 않았지만, 고민하다가 참고문헌에 적어본 이유는 - 이 책의 결말이 결국 온라인 극우 청년들에게도 '타인으로부터의 진정한 존중'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대를 인정하는 것만이 그들 자신을 위한 구원이기도 하다는 메시지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좀 어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요는 제가 멋지다는 걸 개미 앞에서 잔뜩 자랑해봤자 좀 허무하니까요. 진정 우리가 자아를 존중받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진심으로 상대를 '만만치 않은 존재(=나와 대등한 존재)'로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글 속 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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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기울여 듣는 경험

독서시간: 약 3분 / 글자수: 약 1500자

🖍글 속 한 문장

“청자는 화자가 이야기할 때 평상시에 활용할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하거나 딴청부리는 자세를 취해 최대한 듣지 않도록 합니다. 예를 들면 스마트폰을 계속 보거나, 자료를 보거나 하여 화자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화자와 눈을 맞추지 말고, 어떠한 응대 또는 대꾸도 하시면 안됩니다. 실습이 끝나는 시간까지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 어떤 커뮤니케이션 워크숍의 실습 자료를 접했다. 상대가 경청하지 않을 때의 기분을 느껴보자는 취지로 마련된 순서였다. 이 예문이 이른바 ‘딴청의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라면 ‘경청의 기술’은 이와는 정반대겠다 [...]

짧은 경험에 의하면, 쌍방향 소통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경청하는 태도는 언제나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는 소통의 참여자가 적어질수록 더욱 커졌다 [...] 쉼 없이 경청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면 나는 잘 듣는 일에도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저는 틈틈이 관심있는 북토크나 강연을 찾아가곤 합니다. 정 시간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가능한 경우엔 온라인 강연을 신청하기도 하는데요. 이왕이면 오프라인 강연을 가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오며가며 시간과 노력도 훨씬 많이 들고, 오프라인 강연에선 딴짓을 하지 못하게 되는데도요.

명확한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하긴 어렵지만, 아마도 이는 나름의 '듣기의 각오/태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하는 사람의 각오가 있다면, 듣기에도 각오가 필요할 것입니다. 규모가 적은, 대면 소통에서는 이를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갖추게 됩니다. 그래서 통상 우리는 '온라인/비대면 소통'을 수용자 입장에서 '더 간편한 소통'이라는 식으로 꽤 오해하고 있지만, 오히려 저는 비대면 소통의 경우 훨씬 수용자의 자율성 및 의식적인 귀 기울이기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을 통해 진정한 경험을 얻기 위해서라면요.

우리는 모두의 불편이다 : 손절사회

독서시간: 약 5분 / 글자수: 약 2500자

🖍글 속 한 문장

‘타인이 나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규칙은 나에게 좋지 않은 것이 완전히 사라진 나만의 청정구역을 만들겠다는 선언이다. 이런 결벽증적 태도의 일반화는 단순히 세상 각박해졌다는 정도로 묘사할 것이 아니다. 괴로움을 동반하지 않는 사회적 관계는 없으므로, 내 불편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은 곧 관계 자체를 거부하겠다는 의미다. 요즘 많은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은가? 불편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진 관계의 다양한 요소를 구별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 채, 그 어떤 불편도 거부하려는 태도만 강화되는 것이 아닌가?

👤김스피의 블라블라

어느샌가부터 '불편'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로 어떤 언행, 메세지 등이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당연히 우리에겐 불편함이 존재합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불편함'이라는 증상을 더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불편하다는 이유로 피하려고 할 때겠죠.

실제로 불편에도 다양한 층위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대략 어떤 내용인지 짐작은 가지만 왠지 기분은 좋지 않은 것, 나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것, 존재하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 때리고 싶은 것... 이런 각각의 층위에 맞추어 불편을 '신호'로서 받아들이고 경우에 따라 그 불편과 정면으로 마주할 각오를 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타인/사회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대화로부터의 도피

NYT(영문)

🖍글 속 한 문장

“지난 15년 동안 나는 모바일 연결 기술을 연구하고, 다양한 연령과 환경의 수백 명의 사람들과 그들의 모바일 기기 사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결과, 우리 대부분이 가지고 다니는 작은 기기들이 너무나 강력해서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까지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나는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는 이 느낌이 페이스북 페이지나 트위터 피드가 왜 그토록 매력적인지, 그리고 수많은 자동 청취자를 제공하는지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 우리는 기술에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서로에게 덜 기대하며, 관계에 대한 요구 없이도 마치 동반자처럼 느껴지는 기술에 점점 더 끌리는 듯한다. 항상 켜져 있거나 항상 켜져 있는 기기들은 세 가지 강력한 환상을 심어준다. 첫째, 항상 우리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들릴 것이라는 환상, 둘째, 원하는 곳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는 환상, 셋째, 어디에 있든지 결코 혼자일 필요가 없다는 환상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오늘 레터의 본문에서는 '대면 대화'를 다소 이상적으로 그려냈을지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대면 대화라고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만은 아니고,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가 적다고 해서 모두 진정성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또한 아닙니다. 실제로 과거 많은 작가들은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도' 소통의 불가능성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파고들어왔습니다.

오히려 대면의 상황은 물리적으로 위협당하거나, 호된 수치심에 시달리게 될 위험도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면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야기들이 많은 이유는, 대면 소통을 통해 우리가 존중받는 경험을 하고, 예측하지 못한 우연에 마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한 연구자님께서 피드백코너에서, 오늘날 지나친 갈등의 사법화로 인해 '갈등'을 마주하는 법을 모르게 된 세상-주제에 대해 다루어보았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주셨었는데요. 오늘 레터를 쓰면서 그 질문에 대해 여러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직접적으로 본문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사실 오늘날 어떤 사소한 문제들조차도 SNS로 '공론화'하는 현상과 갈등의 '사법화'는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있는 부분이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갈등에도 정말 다양한 층위가 존재하는데, 사람들 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경우에도 누군가의 말끔한 해결을 바라게 되니까요. 참고로 오늘 레터에서 다룬 <수치심의 힘> 저자인 제니퍼 자케는 '수치심을 도구화할 수 있기 위한 요건들' 가운데 <그 문제가 충분히 심각할 것>을 꼽고 있습니다.

‘혐오발언’은 ‘혐오문제’인가? : 공동체의 복원

NYT (영문)

🖍글 속 한 문장

"말다툼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바꾼 적은 없어요." 그녀는 다음 날 사무실 소파에 앉아 10월 12일 Hulu에서 첫 방송되는 드라마 영상을 보며 말했다. "사실도 마찬가지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은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 못해요."

실버먼 씨는 책상 위에 걸린 미국 국기를 마주 보며 손짓을 하며, TV에는 자신의 옳음을 확신하며 상대가 왜 틀렸는지 설명하는 코미디언들이 많다고 말했다. "저는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 듣는 데 관심이 있어요. 진부하고 히피스러운 것처럼 들리겠지만, 감정은 모든 것의 근원이죠."라고 그녀는 말했다[...] 실버먼씨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설렘을 안겨준다고 말한다. "저는 열렬한 공화당원이 될지도 몰라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조앤 리버스는 70살이 되어서야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았다고 했죠. 그래서 저는 지금 긴장하고 있어요."

👤김스피의 블라블라

섬네일은 2017년 Hulu에서 진행된 미국 코미디언 사라 실버만의 'I Love You, America with Sarah Silverman'(링크) 스틸컷입니다. 진보성향의 코미디언이 트럼프 지지자들을 직접 만나며 대화를 나눕니다. 아마 연구자님들께서도 그간 비슷한 종류의 글들을 많이 보셨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선 아주 나쁘게 굴던 사람도, 실제로 마주보고 대화를 하면 생각보다 젠틀하다는 거죠. 이건 사람들이 '지킬 앤 하이드'라서 그런걸까요?

아무래도 어빙 고프먼의 책이 조금 하드(?)하다보니, 오늘 레터에서는 그 책의 다양한 결을 충분히 레터에 녹이지 못한 것 같아서 좀 아쉽긴 한데요. 개인적으로는 이번 레터를 쓰면서 고프먼의 책을 읽었을 때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개인의 '성격 및 언행'을 독립적이고 단일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상대, 맥락, 의례 등의 요소가 결합된 상황적이고 다면적인 것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무래도 미시적인 의례에 주목을 하다보니, 언행의 내용(!)에는 놀라울정도로 신경을 쓰진 않습니다.

처음엔 이런 부분이 좀 낯설게 느껴졌는데, 책을 다 읽어갈 때쯤엔 저는 어쩌면 오늘날 굉장히 큰 문제시되고있는 '혐오발언'들을 혐오의 문제라기보다는 공동체와 의례의 문제로 접근해야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느낌표가 생겼습니다. 실상 위험을 감내하고, 아동들이 자신의 자아를 제대로 표현하고 도전할 수 있는 공동체 및 의례가 전혀 없는 사회에서 그 내용만 지적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싶기도 했던 것이죠.(내용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애초에 별 생각 없이 휩쓸려 발언한다는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오늘날 커뮤니티에서 혐오는 스포츠다'라며 한탄하는데, 저는 어쩌면 그 한탄이 맥락은 좀 다를지라도 고프먼의 차원에서는 정곡을 찌른 것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해결은 공동체를 복원하고, 체면과 의례를 되살리는 것이겠죠.

이 코미디/토크쇼의 컨셉을 보며, 최현숙의 <할배의 탄생>(링크)이 얼핏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좀 어색(?)한 표현이긴 하지만, 만약 1:1 대화를 '두명뿐인 공동체에서의 - 상대방을 도저히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극도로 의례적인 소통/존중을 받고 주는 진한 경험'이라고 한다면, 이런 대화에서야말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겁니다. 아니, 실은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상대를 이해할 능력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이런 대화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이런 우아한 측면은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할배의 탄생>은 실은 그저 할배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듣는것만이 목적은 아니긴 합니다만, 저는 이 지점까지 포함해 이 책이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레터의 챕터3의 '회복과정'을 생각해본다면 저자는 이 1:1의 공동체에서 비로소 할배의 삶에 '관여'하기로 결정하고 '도전'을 시도해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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