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웨이가 미국 엔비디아의 인공지능(AI) 칩 H100 성능에 맞먹는 최신 AI 칩을 다음 달부터 공급한다고 알리며 미국의 수출통제에 맞선 중국의 반격이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미국 정부가 엔비디아의 중국 맞춤형 AI 칩 H20 수출을 막으면서 화웨이가 그 빈자리를 채울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화웨이가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엔비디아에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공급하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등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다만 화웨이의 기술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만큼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에 무게가 실린다.
22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화웨이는 이르면 5월부터 최신 AI 칩 ‘어센드 910C’의 대량 출하에 돌입할 계획이다. 일부 제품은 이미 고객사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엔비디아와 AMD의 고성능 칩은 물론 중국 전용 저사양 칩에까지 수출 금지령을 내린 가운데 910C는 중국 내 주요 AI 기업들의 주력 칩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전망된다. 910C는 기존 910B 칩 두 개를 통합한 패키지형 칩으로, 연산 성능과 메모리 용량이 모두 두 배로 향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910C의 성능이 엔비디아의 H100에 근접한 수준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2022년 10월 조 바이든 전임 행정부가 시작한 미국의 대중 수출 규제가 세질수록 중국 기업들의 기술 자립은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전용으로 설계된 엔비디아 H20 칩마저 수출제한 대상에 포함하면서 중국 기업들은 국산 AI 칩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무어스레드, 일루베이터코어X 등 신생 그래픽처리장치(GPU) 업체들도 잇따라 AI 칩 개발에 뛰어들었다. 특히 성능 향상 속도가 눈길을 끈다. 반도체 분석 업체 세미애널리시스는 “화웨이가 기술적으로는 한 세대 뒤처져 있지만,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상당히 주목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인 중신궈지(SMIC)는 7㎚(10억분의 1m) 공정을 활용해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 AI 칩 생산을 뒷받침하고 있다. 수율은 낮아도 생산 기반은 확보된 셈이다.
중국 반도체 생태계가 빠르게 확장하고 있는 흐름은 시장 데이터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매출 증가율 1위와 2위는 각각 중국 YMTC(145.2%)와 화웨이 자회사 하이실리콘(107.7%)이 차지했다. 테크인사이츠에 따르면 중국 반도체 자급률은 2014년 14%에서 2023년 23%까지 상승했고 2027년까지 27%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화웨이가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엔비디아에 HBM를 공급하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등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 세계 HBM 물량의 60% 이상이 엔비디아 GPU에 탑재되는 만큼 엔비디아의 중국 내 매출이 줄어들 경우 메모리 수요 감소와 가격 인하 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업계에서는 화웨이가 AI GPU를 안정적으로 대량 공급하는 데는 넘어야 할 산이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AI 반도체의 경우 네덜란드 ASML이 최첨단 반도체 양산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에 이어 올해에는 심자외선(DUV) 노광장비의 중국 출하를 중단해 정상적인 생산이 어려운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엔비디아에 비견되는 고성능 칩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공정과 비용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김형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화웨이가 빠른 속도로 기술을 끌어올리고 있지만 대량 양산에는 정부의 보조금이 필요할 정도로 많은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된다”며 “미국의 수출 규제에 맞서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과시적 성격도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화웨이가 AI GPU 시장에서 입지를 강화할수록 중국 메모리 기업들의 HBM 개발에도 속도가 붙을 수 있다는 점은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중국 1위 D램 기업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는 내년 HBM3(4세대), 2027년 HBM3E(5세대)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화웨이 칩의 성능이 엔비디아에 비견될 만한 수준인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일부 수요 이동이 일어날 가능성은 있다”며 “중국이 HBM 개발에 속도를 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