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존들

2024-11-19

거리도 가깝고 자주 들르는 곳인데도 유독 어렵게 느껴지는 공간이 있다. 그 안으로 아무렇지 않게 동화되어 들어가기까지 용기가 필요한 공간. 가까스로 적응하고 나서도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맞나? 가끔씩 묻게 되는 곳. 내겐 헬스장이 그렇다.

내가 2년째 다니고 있는 우리 동네 S헬스장은 헬스 마니아들에게 나름 유명한 곳이어서 다른 동네에서 원정 운동을 오기도 한다. 머신 라인업이 좋다고 알려진 곳답게 웨이트존은 다양한 머신들로 채워져 있다. 내가 가는 시간대에 S헬스장은 두 구역으로 확연히 갈린다. 주로 이삼십대 남성 회원들이 점하고 있는 웨이트존. 그리고 육칠십대 여성 회원들이 다수인 유산소존.

어떤 한 공간에 익숙해지려면

거기에 머무는 시간 많아져야

운동하며 깨닫는 집중의 의미

‘사고의 진공지대’ 빠지는 기쁨

처음 S헬스장에 등록했을 때 나는 다른 곳에서 프리 웨이트의 기본기를 막 익히고 온 의욕에 찬 헬스 초보자였다. 바벨과 덤벨만 있다면 어디에 있더라도 금세 강인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경기 북부에 거주하는 40대 여성 중에 ‘원 레그 데드리프트’를 제일 잘하는 건 내가 아닐까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차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웨이트존으로 걸어들어가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선 매번 용기가 필요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눈치가 보였고, 각종 머신을 비롯한 웨이트존의 모든 ‘바이브’가 40대이고 여성인 나를 티 안 나게 내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유산소존으로 넘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파워랙(power rack) 한 귀퉁이와 덤벨존만을 오가다 운동을 가는 횟수가 점점 줄었고, 그렇게 2년 동안 골격근량을 차근차근 잃어갔다.

근 성장을 위해선 머신들과 조금이라도 익숙해지는 게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다시 헬스장에 자주 나가기 시작한 건 지난달부터의 일이다. 헬스장에 다시 나가고부터 나는 어떤 한 공간에 익숙해지는 건 거기에 머무는 물리적 시간과 비례한다는 일견 당연해 보이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간을 쏟을수록 그곳엔 어떤 식으로든 가치와 의미가 생기기 마련이고 단순한 한 공간이었던 곳이 그렇게 ‘있을 의미’가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일 테니까.

내가 헬스장에서 가장 자주 보는 회원은 60대로 보이는 한 여성 회원이다. 어느 시간대에 가도 헬스장에서 운동 중인 그분을 볼 수 있는데, 벌크업 중인 회원보다도 그녀가 자주 보이는 건 이 헬스장이 그녀에게 당연한 듯 주어진 공간이 아니어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는 이 거대한 공간을 자신의 장소로 만들기 위해 그곳에 익숙지 않은 자신을 얼마나 견디며 시간을 다듬어왔던 걸까.

오전에 운동을 가는 날 자주 보게 되는 한 남성 회원도 있는데, 그는 늘 후드티의 모자를 올려 쓰고 머신 한 곳에 앉아 있다. 한눈에도 운동을 오래 한 듯 보이는 그는 모자를 내리면 70대 정도로 보인다. 70대의 몸을 겪는 것이 평생 운동을 해온 자신 또한 낯선 일인 듯 그는 머신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많다.

운동을 하는 시간보다 앉아서 쉬어야 하는 시간이 많더라도 일단 헬스장으로 나와 시간을 보내야만 거기에 있는 자신의 모습과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굳이 헬스장 문 앞에 ‘노아줌마 존’과 ‘노시니어 존’을 내걸지 않아도 누군가에겐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 내 한 몸의 자리를 찾는 것이 기본값이 아닌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아무려나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 건 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만이다. 덤벨을 잡든, 바벨을 잡든, 머신에 앉든 일단 운동을 시작하면 내 근육의 움직임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지는 순도 높은 집중력, 그게 웨이트 트레이닝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이시다 가호의 소설 『나의 친구, 스미스』에서 화자는 헬스장에서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야 진정한 집중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말한다. ‘몸은 가장 정직한 타인이다. 신체를 혹사함으로써 얻어지는 사고의 셧다운. 나는 나날이 강인해져가는 신체는 물론이고, 그 진공지대에도 깊이 빠져들었다.’

내 근육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자 그전에는 단순히 ‘헬창’으로 치부해버렸던 웨이트존의 헬스인들도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저 정도의 몸을 만들기 위해 그가 보냈을 시간들과 그 또한 느꼈을 ‘진공지대’의 기쁨에 어떻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보니 S헬스장은 웨이트존이든 유산소존이든 자신의 현재 신체조건 안에서 각자 열심인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었다. 올 겨울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도 S헬스장이었으면 좋겠다.

최은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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