칡, 제주의 풍광을 점령하다.

2025-12-08

고운진, 동화작가

지난달 말이었으리라.

난 병문천 변(邊)을 따라 남쪽으로 거슬러 올라간 적이 있었다. 한라산이 가까워질수록 만산홍엽은 온데간데없고 무채색으로 겨울 채비를 하는 한라산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사는 중산간 마을은 웅장한 한라산을 오롯이 보여주는 곳이기에 난 병문천 상류로 이어지는 이 길을 따라 걷는 걸 무척 좋아한다.

제주에 한라산이 생성되지 않았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은 물론, 창조 여신 설문대 할망에게 제주 백성들이 명주 백 필을 진상했다면 또 어떤 모습이 됐을까 하는 상상까지 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기야 설문대 할망 설화는 지금 현실이 돼 육지에서 제주까지 해저 터널을 건설하자는 제안들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설화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한라산을 만들다 치마폭으로 흘러나온 흙이 360여 개의 오름이 됐다니….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 여신을 만들어낸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할 따름이다.

그래서일까? 난 제주에 살면서 한라산과 오름 외에는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보여주는 풍광을 별로 본 적이 없다.

무슨 생뚱맞은 소리를 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내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공감할 것이다.

아니 못 믿겠다면 지금 당장 들판에 나가 제주의 풍광을 바라보라! 한라산과 오름만 보일 뿐 다른 모습은 보이질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바로 녹색 좀비 칡넝쿨이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곰솔도 삼나무도 붉은 동백은 물론, 후박나무까지 제주 산야에 존재는 하나 보이진 않는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칡넝쿨 속에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이들을 살려내고 그 모습을 도민과 관광객들에게 보여주려면 녹색 좀비 칡넝쿨을 제거해야 한다. 시급한 일이다. 내가 녹색 좀비로 표현한 이 칡은 아무리 덩굴을 제거해도 환경에 따라 하루에 30㎝ 이상 자라고 심지어 서로 꼬며 올라가 고목까지 덮어 버리니 가히 모든 걸 쑥대밭으로 만드는 무법자라 아니할 수 없다.

행정이 뒤늦게라도 심각성을 알아차린 것일까?

올해 대대적으로 칡넝쿨 제거 사업을 진행하고 ‘제주 숲 공간혁신 프로젝트 시즌2’를 추진하면서 900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투자하고 있다니 늦었지만 다행이다. 이제는 체계적인 제거 작업으로 아름다운 숲을 되살리는 데 모든 행정력을 집중하겠다고 한다.

행정을 믿을 수밖에 없지만 수천억을 투자해 나무를 심어도 소용 없다는 사실은 알아야 한다.

용역업자들은 나무를 심으면 그만이고 칡뿌리까지 원천 제거하지는 않아 1년 후 말짱 도루묵이 될 수밖에 없기에 하는 말이다.

전국에서 최초로 ‘자생 세미 맹그로브숲’이 조성된 풍광은 상상만으로도 설렌다. 하지만 이 숲이 실현되려면 주요 간선 도로변만이라도 칡뿌리까지 원천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아름다운 제주의 지평선 모습을 되찾을 수가 있다.

대설도 지나고 이제 곧 동지이다. 겨울의 한복판이지만 아직도 들판엔 생명력이 강한 칡넝쿨만 무성하다.

곰솔과 삼나무 동백은 물론 후박나무까지 오롯이 지평선에 제 모습을 드러낸 풍광은 언제쯤이나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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