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언제부터 공장 김치, 포장 김치를 사 먹게 되었을까? 공장 김치와 포장 김치는 동의어가 아니다. 공장 김치가 먼저이고 포장 김치가 이후다. 공장 김치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은 대략 1970년대 초반 즈음으로 파악되는데,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김치는 급식용으로 주로 활용되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병원 등지에서 공장으로부터 김치를 구매하여 환자식으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어 김치를 소분 포장하여 가정용으로도 판매하게 된 것이다.
그 무렵 수퍼마켓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소매점이 대도시 지역에 확산되면서 단순 소분 포장 형태의 김치의 판매가 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에 들어서는 수퍼마켓에서 제대로 된 포장 형태의 김치가 꽤 팔리면서 주부들이 매우 편리해 하고 있다는 기사들이 신문에 등장했다.
70년대 말 수퍼에서 인기 끌다
일 ‘기무치’ 등장에 폭발적 성장
편해진 주부들 경제활동 나서

좀 더 과거로 돌아 가보자. 1962년 11월 6일자 경향신문에서는 ‘해마다 되풀이되는 김장의 고역을 덜 수는 없을까?’라는 제목의 기사가 장벽처럼 쌓여 있는 배추 더미 사진과 함께 등장했다. 당시에도 김장은 주부들에게 큰 고역이었나 보다. 해당 기사에서는 김치 공장이 있으면 좋겠다는 주부들의 바람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무릇 한국인은 집집마다 입맛이 달라서 획일화된 공장 김치론 만족할 수 없을 것이며, 김치를 제대로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해서 공장 김치의 등장은 어렵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공동 김장 담그기’라는, 백지장을 맞들자는 허망하고 맥없는 제안만 남았다.
그러나 주부들의 애절한 염원은 엉뚱한 곳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는데, 1965년 원자력연구소에서 방사선을 활용한 김치 통조림 기술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곧이어 김치 통조림 공장이 인천에 지어졌으며, 1967년 통조림 김치가 첫 수출 된다. 수출된 곳은 미국. 그러나 이 통조림 김치는 당시 미군을 통해 파월 국군장병에게 공급하는 C-레이션(전투식량)의 구성품으로 개발된 것이었다. 이 김치 통조림은 테스트를 위해 국내 시장에 우선 판매했는데, 이 김치 통조림이 포장 김치의 출발점으로 보인다. 당시 독일에서 공부하던 한국 유학생에게 대통령 하사품으로 김치 통조림이 전달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러나 통조림 김치가 우리의 일상식으로 들어오기엔 편리함 대비 품질에서의 부족함이 있었다.
1981년 김치와 관련한 또 다른 신박한 사건이 벌어졌다. 한양유통이 처음으로 절임 배추를 기획하여 수퍼마켓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로부터 김장할 때 배추 절이는 것은 머슴의 일, 김치 속을 채우는 것은 마님의 일이라 그런지, 유통이 머슴의 일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 절임 배추는 큰 인기를 끌었는데, 당시 관련 기사를 보면 1985년에 이미 각 가정에서 담그는 김장의 양은 이미 줄어들고 있다는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가정 내 김장 문화가 이때부터 서서히 사라지며 본격적으로 편리함을 추구하는 시대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던 중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수퍼마켓에서 가정용 포장 김치 판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이 ‘기무치’로 전 세계 각국에 김치 수출을 먼저 시작했는데 88올림픽을 앞두고 더 이상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범국가적 극일정신이 작동하기 시작하며 신제품 개발이 쏟아졌다.
당시 일본에서 제조한 김치는 대체로 살균 처리를 한 후 수출을 했기 때문에 일종의 ‘죽은 김치’인 셈이다. 이 죽은 김치는 발효가 정지되기 때문에 맛 변화가 없고 가스가 생겨서 포장재가 터지는 참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겐 신선함이 느껴지지 않는 그냥 죽은 김치일 뿐이다. 이걸 외국인들에게 김치라고 해서 판다고? 김치 발원국이 일본에 밀릴지도 모른다는 분함, 그리고 김치가 아닌 것이 김치로 팔리고 있다는 그 수치심이 원동력이 되어 살아 있는 ‘진짜 김치’를 개발·수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정부의 주도 하에 김치 관련 범국가적 연구·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포장 김치는 혁신을 맞이하게 된다. 포장 기술의 혁신, 발효 기술의 혁신으로 살아있는 진짜 김치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김치 제조사는 수출만 보곤 이 비즈니스를 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 기반 시장을 만들어 내야지만 일본의 기무치를 이기고 한국의 김치를 수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혁신적인 포장 김치가 수퍼마켓 매대를 채우게 된 것이다.
88년 서울 올림픽이 이후 포장 김치의 혁신과 확산으로 가사 노동의 압박에서 대한민국 주부들이 해방되기 시작했다. 가사 노동의 압박에서 벗어난 주부들은 경제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올림픽 개최를 통한 세계화와 민주화 그리고 주부들의 경제 활동의 참여. 대한민국은 당시 유행했던 표현,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기’에 들어서게 된다.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푸드비즈니스랩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