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을 위한 변명

2024-10-16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오랜 세월 동안 10월 둘째주 목요일은 신문사 문화부 야근 날이었다. 문학담당 기자는 일찌감치 신문 1면 스트레이트부터 2~3개 면을 펼칠 분량의 기사를 쓰고 대기했다. 그 뿐 아니라 며칠은 너끈히 먹고도 남을 기사를 줄줄이 써서 쟁여놓았다. 사회부 현장기자들은 경기도 안성 혹은 수원으로 몰려갔다. 그 집 앞에는 방송사 중계차부터 각사 기자들까지 장사진을 이뤘다. 그 집은 시인 고은의 집이었다. 그러나 매번 스웨덴 한림원이 발표하는 이름은 다른 이름이었다. 매번 문학담당 기자만 남아서 예상치 못했던 변방의 어느 나라 작가의 자료를 찾아 기사를 쓰느라 분주했다. 시인 고은 역시 소감이 필요치 않았다.

새천년 이후 노벨문학상 후보는 당연히 고은이었다. 발표 이전에는 누가 될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모두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다면 고은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에 영국 도박사이트가 고은의 수상 가능성을 높게 봤고, 일부 외신에서도 고은을 유력 후보로 거론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10월 둘째주 목요일이 돼도 고은의 집 앞에 가서 '뻗치기'를 하는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강의 수상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대비하지 않은 이면에는 고은의 '그 사건' 이후 노벨문학상에 더 이상의 기대가 없었던 이유도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원로시인 고은은 2018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투사건'으로 인해 평생 쌓아놓은 문학적 업적과 명성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수십년 전 서울 인사동의 어두컴컴한 술집 귀퉁이에서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를 했다는 폭로 때문이었다. 정작 본인도 잊고 있었을 그 일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노시인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것이다. 그 행위의 사실 여부를 떠나 그로 인해 평생을 써온 한 시인의 언어들이 용도폐기 됐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노벨문학상이 나이 순이나 경력 순으로 받는 것은 아니다. 한강이 그의 아버지 한승원 작가의 세대를 제치고 이 상을 받았다고 해서 전혀 이상할 일도 아니다. 또 앞으로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한강 이전의 세대인 황석영이나 이문열, 조정래가 받을 수도 있다. 여하튼 노시인 역시 후배 작가의 수상 소식에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별다른 소감을 찾아볼 수는 없다. 황석영 작가가 한강의 수상 소식을 접하고 언론에 소감을 전했다. 황석영은 축하글에서 "한강의 이번 노벨상 수상은 고통과 수난의 치유자였던 한국인과 한국 문학이 걸어온 길 위에서 이뤄낸 빛나는 성과"라면서 본인도 한강의 성취에 힘입어 몇 발짝 더 나아가고, 더 좋은 작품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은 한강의 노벨상을 축하하는 글에서 "한국소설의 대부분이 젊은 여성작가들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면서 "이는 오래도록 민족 민중 계급 등의 대문자 주체에 숨어 세상을 지배하는 남성 가부장의 목소리에 대한 결연한 거부이며 나는 이것이 어느덧 21세기 한국소설의 주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세월도 흐르고, 세대도 교체된다. 고은 시인 역시 민족, 민중, 계급 등의 대문자 주체에 숨어 세상을 지배해온 남성 가부장에 해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평생 한국문학의 발전에 헌신했으며, 후배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노시인의 업적이 무조건 폄훼 되어서는 안된다. oks34@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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