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한·일 문화 교류사
‘겨울연가’ 계기 한드붐·K팝 아이돌 인기
K웹툰까지 히트… 만화왕국 日 왕좌 위협
2020년대부터 한·일 문화 교류 넘어 협업

한·일 수교 60년 역사에서 문화분야는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일본 문화 범람을 우려한 쇄국에서 문호 개방으로 극적 정책 전환이 이뤄진 후 강력한 양국 문화 혼류가 일어났다. 그 결과 2000년대 거센 ‘한류’가 일본에 유행하면서 양국 문화는 상호 공존의 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일 수교 당시만 해도 문화 교류는 엄두도 못냈다. ‘왜색문화산업’이 범람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양국 문호 개방 대상에서 문화분야는 제외됐다. 한·일 수교 이듬해인 1966년 3월 당시 대통령 비서실에서 작성한 ‘한·일 국교정상화에 따르는 일본의 정신적 침투에 대한 여론’ 보고서는 “일본 문화가 물밀 듯 흘러들어 올 경우에 우리가 주체성 있는 수입태세를 갖추지 않고는 우리 민족이 정신적인 침해를 받게 될 비민족적인 일본의 독소문화에 휩쓸릴 염려가 있다”고 우려했을 정도다.
공식적 문화 교류 단절에도 불구하고 일본 영화와 만화, 대중가요(J팝)는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유통됐다. 일본 대중문화 문호 개방은 중요한 이슈가 됐고 극적 전환은 1998년 출범한 김대중정부에서 이뤄졌다.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한 김대중 대통령 결단으로 1998년 10월부터 단계적 개방이 시작됐다. 만화와 국제영화제 수상작 등 일부 영화 수입부터 시작됐다. 이듬해 2000석 미만 소규모 실내 공연과 일부 영화 장르, 2000년 스포츠·다큐멘터리·보도 방송 프로그램 개방 및 모든 비디오 게임 수입 허용을 거쳐 2004년 1월 노무현정부 때 모든 분야가 전면 개방됐다.

일본 대중문화 단계적 문호 개방은 격렬한 논쟁거리였다. 보수단체와 일부 문화계 인사 등 문화 개방 반대론자들은 일본 문화의 유입이 한국 문화의 ‘왜색화(倭色化)’를 심화시키고 저질적이고 폭력적이며 선정적인 콘텐츠가 범람하여 국내 문화산업을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개방 초기 ‘러브레터’류의 일본 영화와 J팝이 큰 인기를 얻었지만 대세를 이루지는 못했다. 오히려 한국 콘텐츠산업 발전을 자극하며 경쟁력 확보에 기여했다. 그 결과 2003년 일본에서 드라마 ‘겨울연가’가 방영되면서 일본 내 한류가 본격화됐다. 이어서 ‘대장금’ 등 인기드라마가 일본 현지에 방영되면서 한류의 상업적 기반을 만들었다.
2010년대부터는 동방신기, 빅뱅, 카라, 소녀시대 등 아이돌 그룹이 일본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며 한류의 팬층을 10대와 20대 젊은 세대로 확장시켰다. 이후 방탄소년단(BTS)의 세계적 성공과 트와이스·블랙핑크의 등장은 K팝을 일본 대중문화의 주류로 자리 잡게 했다. 또 영상분야에선 넷플릭스와 같은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가 주요 유통 채널로 부상하며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래스’ 같은 드라마가 큰 성공을 거두고 K스타일은 일본의 생활 트렌드가 됐다.
카카오의 픽코마(Piccoma)와 네이버의 라인망가(Line Manga) 같은 한국 웹툰 플랫폼 역시 세계 최대 만화 시장인 일본의 디지털 코믹스 시장을 장악했다. 한국이 개척한 디지털 만화 포맷이 만화왕국을 점령한 사례다.
2020년대부터는 한·일 문화가 거의 대칭적 교류를 이루고 있다. 2023년에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은 단순한 흥행을 넘어 각각 한국 개봉 일본 영화 역대 흥행 2위와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또 이마세, 아이묭 등 J팝 아티스트가 다시 국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국내 일본 콘텐츠 소비 바람은 과거사와 정치적 긴장관계로부터 상당 부분 자유로운 양상을 보인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문화 분야에서 한·일은 단순히 활발히 교류하는 수준을 넘어서 이제 협업을 통해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며 “양국 간 외교적인 이슈나 과거사 등의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있겠지만, 문화 분야에서는 앞으로도 상호 이익이 될 만한 교류와 협력이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성준·박세준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