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비문화가 발달했던 조선시대에는 글씨와 그림에서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했다. 예술적 결과물이 단순히 기예의 영역이 아니라 책의 향기, 문인의 향기, 또는 선비 정신이 담긴 정신 문화의 영역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서권기는 말 그대로 책의 향기다. 책의 향기가 몸에 배지 않은 사람은 자기 수양이 부족할 수밖에 없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왜곡되거나 편협하기 십상이다. 책이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하는 이유다.
지면보다는 화면에 익숙해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책을 얼마나 읽을까.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국민독서실태조사를 보면 국민 10명 중 6명은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히 책과 멀어지는 세상이 아닐 수 없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그나마 책에 노출될 일이 많아서 독서율이 높게 나타나지만 성인의 경우 20대는 74.5%, 40대는 47.9%, 60대 이상은 15.7% 수준에 불과하다.
도내 상황도 별반 다를 건 없다. 도내 학생들의 연간 독서량은 25.7권으로, 전국 평균인 36권에 크게 못 미친다. 독서를 방해하는 주요 원인으로는 ‘시간이 없어서’라는 응답(24.4%)이 가장 많았고, 스마트폰이나 게임 등 다른 매체의 이용(23.4%), 책 읽는 습관이 들지 않았다(11.3%)는 이유가 뒤를 이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책 읽기는 점차 뒷전으로 밀리는 현실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지난해 10월,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수상 엿새 만에 100만부가 넘는 기록적인 판매량을 보였고, 서울의 한 독립서점이 독서명소로 떠오르기도 했다. 인근 서촌 한옥마을 일대의 식당과 카페도 덩달아 활기를 띠며, ‘책 한권’이 문화와 경제를 동시에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도시를 변화시키는 책의 힘은 전주시에서도 확인된다. 전주시는 도서관을 단순히 책을 빌려주는 공간이 아닌, 지역문화의 거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시립도서관 ‘꽃심’을 중심으로, 책기둥, 학산숲속시집, 첫마중길여행자, 다가여행자, 서학예술마을, 연화정, 한옥마을, 동문헌책 등 8개의 도서관을 특화시켜서 운영하고 있다.
각 도서관은 저마다의 색깔과 매력으로 주민과 방문객을 끌어들이며, 전주의 문화 정체성을 담은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비근한 예로, 2019년 개관한 꽃심 도서관에 현재까지 979개 기관에서 12,000여 명이 넘는 방문객이 다녀갔다고 하니 인상적이고 반가운 현상이다.
전국 유일의 도서관 여행프로그램도 이목을 끈다. 전용 버스를 타고 전주시 곳곳의 도서관을 돌아보며, 지역문화와 책을 함께 체험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독서 활동을 넘어 관광, 도시 브랜딩을 결합한 참신한 사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2021년 시범운영 이후 현재까지 2,570명이 참여했고, 타 지자체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도서관이 도시의 이야기를 품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동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독서는 단순한 지식 축적을 넘어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창의적 사고와 공감 능력을 기르는 동시에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힘을 키우는 철학적 행위이다. 특히 디지털미디어와 자극적인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일수록 독서의 힘은 더욱 절실하다.
책 한 권이 도시를 바꾸고, 지역의 미래를 연다. 지금 전주는 그 가능성을 이미 증명하고 있다. 이제는 이 흐름을 전북자치도 전역으로 확산시켜야 할 때다. 책을 가장 가까이 두는 지역, 책으로 가장 깊이 연결된 공동체, 그렇게 해서 서권기가 넘실대는 전북이 되었으면 한다.
장연국 <전북특별자치도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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