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범 前 특전사령관·군사안보 전문가 “특전사는 정권 위한 사병 아냐… 12·3 사태 아찔했던 순간” [나의 삶 나의 길]

2025-01-14

이번 비상계엄 사태 소회는

“특전사는 극한 훈련 견뎌내며 군 생활

나라·국민 수호 부대… 최강 자부심 강해

여의도 의사당 투입에 혼란스러웠을 것

온당치 못한 명령은 거부하는 게 옳아”

38년간 군인의 길

연대장 시절 소총중대장에 여군 첫 임명

사단장 때는 27사단 이기자부대 이끌어

전역 병사에 먼저 경례… 추억 만들어줘

‘병사 복지 향상에 최선 다한 지휘관’ 평가

엄격한 특전사령관으로

고립무원 적진서 임무 완수 책임감 발동

훈련 강도 대폭 높이고 살인무술도 도입

특전사 여군 배려 사나이→전사들 변경

이동사격 방해 탄피 100% 회수도 없애

‘해외통’으로 맹활약

이라크 파병… 현지 선거업무 무사히 수행

아프간선 납치 샘물교회 신도 구출 성공

1983년 아웅산 테러 당시 합참의장 구해

“군인은 임전무퇴 기상으로 책임 다해야”

오후 2시. 약속시간에 맞춰 카페의 유리문을 밀고 그가 들어섰다. 우람한 체구는 아니지만 탱크처럼 탄탄한 모습이다. 예순 중반을 훌쩍 넘겼는데도 기력은 마치 쉰 초반처럼 흘러넘친다.

‘예비역 육군 중장 전인범/ 군사안보 전문가/ 전)특수전사령관.’ 건네받은 명함에 적힌 정보다.

며칠 전 인터뷰 일정을 잡기 위해 그와 통화한 것은 밤 11시20분을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각종 유튜브 채널 출연이나 페이스북 등에 올린 글에서 보듯 요즘 그는 하루 네 건 이상 꽉 짜인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다.

별 셋, 스리 스타 출신의 그가 제안한 장소는 서울 약수역 인근 카페. 전국 곳곳에 체인점을 둔, 별실이나 칸막이 하나 없이 장삼이사가 드나드는 트인 곳이다. ‘병사들을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잘 입히고, 좋은 장비를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 지휘관’이었다는 평가가 그냥 매겨진 것은 아닌 듯하다.

유자 레몬티와 캐러멜 마키아토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가장 빨리 출동시킬 수 있으니 707과 1여단을 먼저 보낸 거지요. 1980년 광주에 동원됐던 특전사가 또다시 계엄군이 되어 몹시 안타깝습니다. 특전사는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부대이지, 정권을 위한 사병들이 아닙니다. 이러자고 극한의 훈련을 고독하게 견뎌내며 군생활을 이어온 줄 아는지 …. 헬기에서 내린 대원들은 적진 어디쯤 긴급 작전에 투입된 줄 알았다가 서울 한복판 여의도 의사당에서 우리 국민과 조우합니다. 이게 뭐야. 몹시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무장한 자신들이 뻘쭘했을 테죠. 지금쯤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을 거예요. 대체불가 최강이라는 자긍심, 나라를 지킨다는 자존감으로 청춘을 바치는 대원들이 자칫 민간인 학살자로 전락할 수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어요. 평생 회한 속에서 살 뻔했습니다. 누가 보상할 수 있겠어요.”

12·3 비상계엄에 관한 얘기부터 꺼내놓았다. 때가 때인지라 인터뷰 의도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온당치 못한 명령은 거부하는 게 옳습니다. 급박한 현장에서 판단하기 쉽지 않겠지만, 서너 살 어린아이를 사살하라든가 비무장 시민들을 해치우라는 지시 등은 결코 따라선 안 됩니다. 국민은 보호할 대상이지 제거할 적이 아니거든요.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들이에요. … 박봉에 고생하면서도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대원들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장군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가 너무 많다”고 지적한다. 줄을 대고 진급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이다. 별을 단 자들이 내란에 실패한 후 “대원들에게 미안하다”고 간단히 쉽게 말했다.

“잘못된 명령을 내린 자들에게 죗값을 물어야 합니다. 이들의 죄는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됩니다. … ‘충성’과 ‘명예’를 짓밟은 죗값으로 장군답게 스스로 자결하든지….”

전인범 장군은 군 생활은 물론 예편 후에도 지금까지 육군사관학교 생도 신조를 ‘올바르게’ 지키며 살아왔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다/ 언제나 명예와 신의 속에 산다/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간다.’

그는 민주화를 위한 목소리가 커지던 시절 중대장으로 복무했다. 시위 진압을 위한 ‘충정훈련’을 하고 담당 대학을 정찰하기도 했던 씁쓸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나라를 지키려고 군인이 된 것이지 학생들을 때려잡으려 군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출동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고민이 컸던 때다.

“중대장은 대형 뒤에 서서 진압작전을 지휘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출동하면 맨 앞에 설 계획이었습니다. 당시엔 차라리 가장 먼저 죽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돌아보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던 젊은 날의 중대장 근무를 마친 것이 너무 아쉬웠지만 충정 임무를 벗어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고 술회한다.

대대장이 되어서는 ‘믿음’을 중심으로 부대를 지휘했다. 상관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것은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고, 부하들로부터 신뢰받는다는 것은 믿고 따를 수 있는 상관이 된다는 뜻이었다.

22사단 건봉산 대대 GP 근무는 지형이 험준해 어려움이 많았다. 여름에는 폭우로 사람이 떠내려가고 겨울에는 너무 추워 전봇대가 부러졌다. 강풍에 지프가 넘어지곤 했다. 폐전투복을 잘라 철모 위장을 했는데, ‘왜 거지처럼 했느냐’는 소릴 들었지만 지금은 보편화된 위장술이 되었다.

연대장 시절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여군을 전투부대 소총중대장으로 보직, 강안 경비대대 소속 임무를 부여했다.

사단장 때는 27사단 이기자부대를 이끌었다. 전역하는 병사들에겐 먼저 경례를 했다.

“나중에 군 생활 이야기를 하다가 남들 이야기 다 듣고 나서 ‘난 장군으로부터 경례 받고 제대했다’고 자랑하라고 말해줬습니다.”

이 무렵 군수사령관이 사단을 방문했을 때 남긴 건의사항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사단장실에 판초, 발전기, 슬리퍼를 갖다놓았다. 판초는 비 올 때만 쓰는 우의가 아니라 깔개로도 쓰고 텐트도 만들며 위급할 땐 들것으로도 사용한다. 그러므로 간부들에게도 판초를 보급해달라고 요구했다. 무전기 배터리가 충전식인데 발전기가 없었다. 남한에서는 산골 어디에서도 상설 전기를 끌어다 쓸 수 있다. 그러나 북한처럼 전기 시설이 없는 곳에서는 어떻게 작전을 전개한단 말인가. 슬리퍼는 이등병 때 처음 주어지는데 품질이 허접해서 잘 부러진다. 신병이 들어오면 고참이 뺏어 신는다. 그는 군수사령관 앞에서 슬리퍼를 입에 물고 찍은 사진을 액자에 넣어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머리맡에 두시라 했다. 얼마 후 3000켤레를 받을 수 있었다.

특수전사령부는 육군의 특전사와 해군 특수전전단 중 3분의 1, 공군 침투항공기 등을 포함하는 합동작전 부대다. 적진 깊숙이 들어가 게릴라전, 민사심리전, 수색정찰, 요인 암살 및 납치, 인질구출, 주요 시설 폭파, 사보타주, 항공폭격 유도, 병참선 교란, 대간첩작전 등 특수작전을 전문적으로 수행한다.

특전사령관이 된 그는 10일에 400㎞를 걷던 천리행군을 6박7일 만에 완주하도록 대폭 강화했다. 하루 20시간을 꼬박 걸어야 한다. 세 끼 식사 3시간과 휴식 1시간. 잠을 거의 못 잔다는 얘기다. 극한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살인무술 크라브 마가 또한 도입했다. 이동사격과 즉각조치사격에 방해가 되는 탄피 100% 회수방침도 없앴다. 특전사에 여군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 군가 ‘검은 베레모’ 가사 중 ‘사나이’를 ‘전사들’로 바꾸었고, 사기진작을 위해 특전부사관의 임관식을 신설했다.

“고립무원 적진에 들어가서 아무런 도움 없이 임무를 수행해야 하고, 반도 살아 돌아오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부하들을 보면… 그런 곳에 이들을 보내야 하는 나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선 극강의 훈련을 제대로 시키고… 이들이 살아 있는 동안 가족들과 재밌게 지내며 맛있는 음식이라도 한 번 더 먹었으면 하는 게 제 마음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우리 군 제일의 미군통이자 해외통이었다. 이라크 파병 때 현지 선거관리 업무를 무사히 수행한 공로로 미군 동성훈장을, 우리 정부로부터는 화랑무공훈장을 받으며 최고 영예를 누렸다. 2007년에는 샘물교회 신도들이 선교차 아프가니스탄에 갔다가 탈레반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터졌는데, 미군과 독일, 호주, 튀르키예 등 외국군 병력을 총지휘하며 인질을 구출해냈다.

그는 1983년 버마(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의 영웅이기도 하다. 폭발과 함께 아웅산 묘소의 지붕 전체가 날아갔을 때 지체 없이 현장으로 뛰어가, 머리에 부상을 입고 쓰러진 이기백 합동참모의장을 구해냈다. 인간 전인범은 2차 폭발을 두려워했지만 군인 전인범은 참혹한 광경 속으로 곧장 들어갔다. 훈련된 정신과 육체가 본능을 이긴 것이다. 이때 훈련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이후 그에게 ‘훈련’은 군생활의 기본이 되었다.

“군인은 명예를 존중하고 투철한 충성심, 진정한 용기, 필승의 신념, 임전무퇴의 기상을 견지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책임을 완수해야 합니다.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도 굳게 지녀야 해요. 38년 동안 이 같은 가치관을 갖고 살았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명예를 지키며 살겠습니다. 한·미 관계를 유지, 증진하려 합니다. 군인 복지와 기초 무기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좋아하는 전쟁사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전인범은… ●1958년 서울 생 ●경기고 ●육사 37기 ●30사단 소대장 ●아웅산 폭탄테러, 이기백 합참의장 구출 ●30사단 중대장 ●22사단 대대장 ●9사단 연대장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납치사건 군사협조단장 ●27사단 사단장 ●한미연합사 작전참모차장, 부참모장 겸 유엔군사령부 정전위원회 수석대표 ●특전사령관 ●제1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연구소 방문교수 ●동물자유연대 이사 ●특수 및 지상작전연구회 고문 ●미 육군협회 석좌위원 ●보국훈장 광복장, 미 육군표창훈장, 화랑무공훈장, 미 동성훈장, 미 통합특수전사령부훈장 등 11개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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