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게 상상을 초월하는 현실이 펼쳐질 때, 소설가는 기이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압도적인 상황이 펼쳐지면 책상에서 단 한 줄의 픽션도 캐낼 수 없는 것이다.
뉴스에서 떨어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떼어내 꺼내는 책이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 서신-저항과 복종』이다. 나치에 의해 사형당한 신학자가 감옥에서 쓴 책을 펼치자 오래전 밑줄을 쳐둔 문장이 말을 걸었다. 책과의 대화는 “우매함은 선의 적으로서 사악함보다 훨씬 위험하다”로 시작하는 장에서 절정을 이뤘다. “우매한 자는 악인과 달리 자기 자신에게 완전히 만족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매한 자는 감정이 상하면 쉽게 공격성을 띠기 때문에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 대목은 마치 어제 쓴 글처럼 지금의 상황에 일치할뿐더러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한다. 우매함은 사실상 지적 결함이 아니라 인간적 결함이라고, 지적으로 대단히 영리하면서도 우매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이다. 국정조사에서 변명하던 총리와 장관과 고위 관료들, 군 장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사람의 권력은 다른 사람의 우매함이 있어야 한다”는 문장은 탄핵 표결을 부결시키기 위해 집단퇴장하는 여당 국회의원들의 모습과 완전히 겹쳐 보였다. 책은 도끼처럼 그들의 본질을 내리친다. “이처럼 줏대 없는 도구가 됨으로써 우매한 사람은 온갖 악을 저지름과 동시에 그것이 악행임을 깨닫지도 못한다.”
우리는 이 우매함에 맞서기 위해 촛불과 응원봉을 들었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말한 대로 ‘일인칭의 시점’으로, 각자의 삶 속에서 가져온 빛을 들고 광장을 지켰다. 2016년 촛불집회 때 나는 내 생에 이런 군중을 눈으로 보는 날이 다시 오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나쁜 의미로도 좋은 의미로도 상상을 초월한다. ‘다시 만난 세계’가 우매함을 이기고 우리의 일인칭을 지켜주기를 굳게 믿는다.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