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광장을 꿈꾼 선비와 텍스트 힙스터들

2025-10-31

천고마비(天高馬肥), 무엇이 떠오르는가? 쾌청한 하늘, 선선한 공기, 지극히 만족스러운 가시거리. 그리고 반쯤은 강제적인 ‘독서의 계절’을 빼놓을 수 없다. 기실, 이 풍요로운 성어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추고마비(秋高馬肥)’, 즉 ‘가을 하늘이 높아지니 변방의 말이 살찐다’는 북방 민족의 침략에 대한 경계와 마주하게 된다.

이처럼 등골 서늘한 생존의 경고가 에너지 넘치는 말로 바뀐 연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특하기도 하다. 칼과 창의 긴장을 지성의 향연으로 오랜 시간 전유해온 덕에 천고마비의 계절은 곧 책 읽기 좋은 때라는 우아한 통념이 자리 잡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볕 좋은 휴일의 광장뿐 아니라 비 오는 날의 카페, 의자가 놓인 산책로 그 어디에서든 책을 든 이들을 만나는데 요즘엔 부쩍 그러하다.

‘천고마비’ 연원은 생존의 경고

칼과 창의 긴장이 우아한 독서로

책으로 취향 드러내는 ‘텍스트 힙’

필사 하던 선비들의 힙독과 통해

삼삼오오 모여 읽는 흔한 풍경인가 싶다가, 특정한 장소에 이르러 ‘읽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로 다가오는 낯섦에 걸음을 멈추고 구경한 적이 여러 번이다. 천변에 앉아 책 읽는 이들은 그 자체로 전시이자 살아있는 행사였다. 책으로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을 드러내는 세련된 문화 현상, 다시 말해 ‘텍스트 힙(Text Hip)’ 혹은 ‘힙독(Hip-讀)’에 시선이 가는, 그 시기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기왕 ‘책 읽는 이들’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면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 종이책을 들어야만 독서는 아니다. 필자 역시 전자책을 즐겨 읽고, 오디오북을 음악처럼 듣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책’이라 하면 종이 특유의 질감과 냄새를 가진 실물을 떠올리기 십상이며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힙독 역시 이 물리적인 종이책을 기반으로 확장된 참신한 문화임은 분명하다.

이쯤 되니 더욱 궁금해졌다. 텍스트를 향한 유별난 애착, 읽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물론이다. 3~4세기 전으로만 되돌아가도 우리는 상상 이상의 지독하고 멋스러운 힙독을 만날 수 있다. 다만, 그들의 힙은 ‘드러내는 데’ 있지 않고 ‘파고드는 데’ 있었다.

18세기 학자 이덕수는 스무 살 청년 유척기에게 독서의 비결을 전수하며, 겉만 훑는 ‘소나기 독서’를 지양하고 무젖어 마르지 않는 ‘장맛비 독서’를 강조했다. ‘곳곳을 적시는 정밀함이야말로 무젖음’이라는 말은 ‘밀도의 힙’과 다름 없겠다. 그뿐인가. 사마천 『사기』의 ‘백이전’을 1억1만3000번 읽었다던 김득신의 독법이 ‘집념의 힙’이라면, 책만 읽는 바보를 자처하며 볕 드는 곳 어디서든 책을 펼쳤던 이덕무의 독법은 ‘일상의 힙’ 이었다. 모두가 지식의 성채에서 홀로 이뤄진, 치열한 몰입의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19세기까지 제대로 된 서점 하나 없던 이 땅에서 책은 늘 열망의 대상이었고 얻는 길은 험난했다. 필사의 노력으로 필사(筆寫)해야, 한 번이라도 더 읽을 수 있던 때가 불과 2세기 전이다.

이를 안타까워하며 만인에게 책이 열린 광장을 꿈꾼 이가 앞선 시대에도 있었으니, 바로 유몽인이다. 조선의 인어 이야기며, 각종 K기담 보고인 『어우야담』의 저자로도 유명한 그가 ‘박고서사(博古書肆)’라는 서점을 위해 글 한 편을 남긴다. 임란 직후 수많은 책이 불타 흩어져서일까, 책을 향한 애틋함이 행간에 절절하다. 그는 책이 없어 공부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의 가련함을 적시한 후, 한 장서가가 자신의 소중한 책들을 무료 나눔 하기로 결심한 순간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유몽인은 개인의 ‘있음(소유)’이 모두의 ‘있음(공유)’으로 확장되는 놀라운 변화를 목격했다. 한 사람의 책으로 누구나 지식을 소유할 수 있고, 한 사람의 스승이 없어도 누구나 선현들과 만날 수 있는 경이로운 풍경을 담담히 예찬했다. 혹, 유몽인은 힙독의 열망을 품은 최초의 선비가 아니었을까?

닫힌 서재에서 책장을 넘기던 그들의 작은 시간들이 쌓이고, 읽고자 하는 바람이 모여 마침내 지금, 함께 읽는 광장과 조우하게 되어 다행이다. 우리는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한 선비가 그토록 바라던 힙독의 시간대를 살아왔는지 모른다. 벽돌책에 도전하며 해시태그(#)를 인증하는 젊은 세대는 1억 번 이상 읽으며 필사했던 선비들과 나란히 텍스트 힙의 역사를 통과하는 중이다. 더 많은 곳으로, 더 깊숙이 다양한 힙독의 열풍이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영죽 성균관대 동아시아미래가치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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