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연합(EU)에 인도산과 중국산 제품에 최고 10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을 요구하며 ‘대리 압박’ 외교를 시작했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9일(현지시간) 미국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워싱턴에서 열린 미·EU 고위급 회의에 전화로 참석해 러시아에 종전을 압박하기 위해 이 같은 요청을 했다고 보도했다.
한 미국 관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실현하려면 EU를 비롯해 모든 파트너가 함께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며 “유럽인들이 정말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할 정치적 의지가 있는지 묻는 것이다. (동참 시) 우리는 고통을 함께 나눌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를 이용해 러시아 압박 강도를 한층 더 높이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난달 알래스카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전쟁 중재 시도를 했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향한 공세를 강화하면서 체면을 구겼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요구는 지난달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푸틴 대통령과 각각 양자 회담하며 외교 관계를 강화한 후 이뤄지기도 했다.
미국은 EU가 먼저 인도와 중국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면 자국도 뒤따라 관세를 올리는 방식을 택할 계획이다. 다른 미국 관리는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할 준비가 돼 있다”며 “하지만 유럽 파트너들이 우리와 함께 나서야만 시작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EU가 중국과 인도에 관세를 부과한다면 미국도 같은 수준의 관세를 적용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미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이유로 인도에 총 50%의 상호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중국에는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한 데 대한 징벌적 관세는 적용하지 않고 있다.
미국의 압박에 EU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EU는 대러 제재를 심화하고는 있지만 미국이 상호관세를 부과한 것에 대응해 중국, 인도로 수출처를 넓혀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EU는 올해 안에 인도와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마무리할 방침이었는데,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로 계획이 틀어질 가능성이 있다.
제3 국가를 압박하기 위해 강대국인 미국이 유럽에 관세를 부과하라고 강요하는 행위는 주권침해에 해당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EU에선 이미 EU산 제품에 15% 상호관세를, 미국산 제품에는 무관세를 부과하기로 한 양측 협정이 ‘불공정 합의’라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클러스터17이 이날 발표한 설문 조사에서 EU 시민 52%는 미국과의 무역합의에 대해 “굴욕감이 들었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