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이 화염에 휩싸였다. 불길이 채 꺼지기도 전에 히틀러와 나치당은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 몰아갔다. 방화 현장에서 네덜란드 출신 공산주의자가 체포되었고, 그는 단독 범행을 주장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믿지 않았다. 나치는 “공산당이 독일을 전복하려 한다”는 주장을 퍼뜨렸고, 독일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이 사건은 나치 독일의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나치당은 의회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지 못해 히틀러의 권력 기반이 불안정했다. 히틀러는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빌미로 공산당을 탄압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사건 다음 날, 히틀러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바이마르 헌법이 보장한 시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키는 국회의사당 방화령을 발효했다.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는 중단되었으며, 수천 명의 공산당원과 반대 세력이 체포되었다.
이후 나치당은 1933년 3월 총선에서 공산당을 배제하고 선거를 치렀으며, 나치당은 과반에 가까운 의석을 확보했다. 히틀러는 이를 발판으로 의회를 압박해 수권법(전권위임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행정부에 의회의 동의 없이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독일 국민은 히틀러가 만들어낸 음모론에 의해 점차 독재 체제에 순응해 갔다.
히틀러가 활용한 핵심은 공포와 불안이었다. 그는 공산당이 언제든지 독일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공포를 조장했고, 독일 국민은 안정을 위해 자유의 일부를 포기하는 데 동의했다. 이 과정에서 음모론은 단순한 허위 정보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민주주의적 견제와 균형을 무력화하는 도구로 작동했다.
음모론의 위험성은 그것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특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크다. 음모론은 논리적 검증보다는 감정적 호소를 기반으로 퍼지며, 대중은 자신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믿는 경향이 있다. 이는 정치적 불안정이 존재하는 모든 사회에서 반복되는 현상으로,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음모론이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는 것 같다. “외부 세력이 선거 부정 행위를 통해 사회 혼란을 조장하고 있다”는 음모론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이는 권력층이 위기 상황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음모론은 권력자에게 강력한 도구다. 그것은 불안을 자극하고, 반대 세력을 악마화하며, 나아가 권력 집중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장기적으로 사회의 신뢰를 붕괴시키고,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독일이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민주적 질서를 회복하지 못한 채 2차 세계대전으로 나아갔다는 점은 음모론이 가져올 수 있는 파국을 잘 보여준다. 우리의 사태도 이러한 시도가 반복될 경우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음모론의 확산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언론의 자유와 시민 사회의 감시, 그리고 권력에 대한 지속적인 견제와 균형이다.
음모론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과거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고,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멈추지 않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