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 경제, 사회의 거대 담론이 블랙홀처럼 모든 이슈를 삼킨 연말이다. 하지만 그 어떤 담론 중에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관심은 '누구나 안전하게 살 권리', 즉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각종 안전 관련 법안은 뒷전으로 밀렸고 국정감사 자료는 대한민국 방재안전 생태계가 벼랑 끝에 몰렸음을 경고하고 있다.
현장의 목소리는 반향 없이 사라지고 각종 개선 방안과 법안은 창고 속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다. 핵심은 재난 전문가는 부족하고, 그나마 있는 인력조차 불합리한 처우와 불공정한 제도 탓에 전문성을 사장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이래 줄곧 ‘억강부약(抑强扶弱)’과 ‘공정’을 국정 운영의 핵심 철학으로 강조해왔다. 억울한 사람이 없는 사회, 누구나 노력한 만큼 정당한 대우를 받는 사회는 비단 경제나 사법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하는 ‘국가 재난 안전 시스템’에도 이러한 ‘공정의 잣대’가 시급히 적용되어야 한다. 아니, 오히려 어느 분야보다 시급하다.
◆ 희생만을 강요하는 ‘미스매칭’, 공직 사회의 불공정
현재 지자체 재난 관리 부서의 현실은 ‘불공정’ 그 자체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실무 부서 인력의 대다수가 비전문 인력으로 채워진 ‘미스매칭(Mismatching)’ 현상은 여전하다. 각 시·군·구 재난 부서 20여 명 중 방재안전직은 고작 한두 명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포병부대에 포병 없이 보병만 배치해놓고 승리를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 만약 부대원의 90%가 대포를 다룰 줄 모르는 일반 보병으로 채워져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보병들은 익숙지 않은 거대 장비 앞에서 우왕좌왕하며 공포에 떨 것이고, 고작 한두 명뿐인 포병 주특기 병사가 조종부터 사격까지 혼자 감당하다 탈진해 쓰러질 것이다. 전선은 뚫리고 패전의 고통은 후방 국민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것이다. 이 섬뜩한 가정이 불행히도 현재 대한민국 재난안전 관리 부서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현재 전문성이 부족한 일반직 공무원은 과중한 책임의 공포에 시달린다. 또 극소수의 방재안전직은 고립된 채 ‘독박 업무’를 떠안는다. 가장 험지에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을 수행함에도, 돌아오는 것은 ‘소수 기술직렬’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승진 제한과 소외뿐이다.
권한은 주지 않고 무한 책임만 지우는 시스템, 합당한 보상 없이 개인의 사명감만 강요하는 조직은 이 정부가 타파하고자 하는 적폐다. 따라서 방재안전직렬을 현재의 기술직군에서 ‘행정직군(재난행정직류)’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제안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현대의 재난 관리는 단순 기술이 아니라, 자원을 배분하고 부서를 총괄하는 고도의 행정적 판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지휘관으로 승진할 수 있는 ‘공정한 사다리’를 놓아주는 것이야말로 업무의 본질을 꿰뚫는 ‘비정상의 정상화’다. 또한, 자연 퇴직으로 발생하는 결원을 활용해 비전문 인력을 방재안전직으로 단계적 교체하자는 제안은 예산 증액 없이, 또 조직 내 갈등 없이 조직의 전문성을 높이는 이재명 정부 특유의 ‘실사구시(實事求是)’ 해법이라 할 만하다.
◆ 민간 전문가를 가로막는 칸막이 행정, 또 다른 불공정
공정의 문제는 공직 사회 내부에만 있지 않다. 기후 위기 시대, 국가 재난 대응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할 민간 전문가 영역인 '방재기사'들이 겪는 불합리 또한 심각하다.
정부는 2019년 재난 분야 최초의 국가기술자격으로 ‘방재기사’를 신설해 1,100여 명의 전문 인력을 배출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격을 취득하고도 제도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국토부의 건설기술인, 산업부의 엔지니어링 기술자, 노동부의 안전관리자 그 어디에도 온전히 포함되지 못한 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규범상 ‘방재(防災)’는 자연재해와 사회재난을 포괄하는 광의(廣義)의 개념임에도, 현행 엔지니어링 분류는 화재 중심의 ‘소방(消防)’에 묶여 있어 방재 전문가들이 설 자리가 없다.
또한, 실제 업무는 토목·건설과 밀접함에도 건설기술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어렵게 양성한 국가 공인 전문가들을 제도가 뒷받침하지 못해 사장시키는 것은 국가적 낭비이자, 이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박탈하는 행위임에 분명하다.
엔지니어링 기술 부문에 독자적인 ‘방재’ 분야를 신설하고, 방재기사를 건설기술인 및 중대재해 안전관리자로 인정하는 것은 특정 자격증 소지자를 위한 특혜가 아니다. 기후 재난이라는 거대한 위협 앞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전문성을 총동원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다.
◆ 시스템의 완성이 곧 국민 안전의 완성
최종적으로, 방재관리대책대행자와 참여 기술인에 대한 실적·경력 관리의 법제화 역시 시급하다. 건설, 환경 등 타 분야는 이미 법적으로 경력을 체계적으로 관리받고 있지만, 국민 안전과 직결된 방재 분야만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는 관련 산업 종사자들에 대한 명백한 차별이자, 부실한 재난 관리로 이어질 수 있는 구멍이다.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담당자를 처벌하고 꼬리 자르는 방식은 이제 멈춰야 한다. 그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책임 회피일 뿐이다. 사람을 탓하기 전에 시스템을 공정하게 바꿔야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이재명 정부는 ‘기본 사회’를 주창하며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그중 ‘안전하게 살 권리’는 가장 기초적인 기본권이다.
이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최전선에 있는 방재안전직 공무원과 민간 전문가들을 지켜야 한다. 공무원의 직군 개편부터 민간 자격의 제도적 인정까지, 방재안전 분야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처우 개선이 아니라, ‘일한 만큼 대우받는 공정한 사회’를 증명하고 ‘국민의 생명을 끝까지 책임지는 유능한 정부’를 완성하는 길이다. 공정이 곧 안전이다.
미디어펜=김진호 부사장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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