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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년(1742) 10월 보름, 연천현감 신주백과 함께 관찰사 홍(경보)공을 모시고 우화정 아래에서 노닐었으니, 이는 소동파의 고사를 따른 것이다. 신주백이 관찰사의 명을 받아 부(賦·문장)를 짓고 나는 또 그림으로 이어서 각각 집에 한 본씩 소장했다. 이를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이라 이른다.”
행서 발문 밑에 ‘양천현령 정선 씀’이라 적었다. 66세 겸재 정선(1676~1759)이 소동파의 고사처럼 임진강의 적벽에서 뱃놀이하며 그리고 쓴 화첩이다. 표지와 발문, ‘우화등선(羽化登船·우화정에서 배를 타고)’과 ‘웅연계람(熊淵繫纜·웅연에 닻을 내리고)’ 두 점의 그림으로 이뤄졌다. 연강은 경기 연천군을 지나는 임진강을 말한다. 삭녕 우화정에서 배 타고 출발해 웅연에 도착해 닻 내리는 장면을 담았다. 삭녕과 웅연은 경기 연천ㆍ철원 일부 지역의 옛 이름으로 지금은 접근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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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는 셋이 한 첩씩 나눠 가졌다고 적었는데, 홍경보 소장본 한 벌만 전해오다가 14년 전 겸재 소장본의 존재가 알려졌다. 바로 이 ‘연강임술첩’ 겸재 소장본이 전시에 나왔다. 서울 영동대로 갤러리 S2A에서 열리는 ‘필(筆)과 묵(墨)의 세계, 3인의 거장’전이다. 기획에 참여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이 화첩의 대여가 결정된 순간 전시를 꾸렸다”며 “임진강 풍광을 장대한 파노라마식으로 펼쳐 그린 진경산수화로 흑백 대비가 강렬하고 듬직한 무게감이 감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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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겸재의 무르익은 필치를 볼 수 있는 또 다른 그림으로 ‘수송영지도(壽松靈芝圖)’도 전시됐다. 아무렇게나 휘어 뻗은 가지, 풍상 이긴 옹이 자국이 곳곳에 난 줄기는 조선 소나무의 흐드러진 멋과 굳센 생명력을 보여준다. 여기 싱싱하게 자란 영지버섯을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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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영지도’와 마주 걸린 것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대련(쌍폭작품) ‘대팽고회(大烹高會)’. “맛있는 요리는 두부와 오이 생강나물, 좋은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주가 한자리에 모인 것”이라는 명대 오종잠의 싯구를 소박한 필치로 썼다. 70세로 타계하기 직전 쓴 무심한 경지의 간송미술관 소장본이 유명한데, 이번 전시에는 북청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과천에 살던 67세 추사의 칼칼한 글씨가 나왔다. 동시대 문인인 유최진(1791~1869)이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라고 칭찬한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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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1928~2007)의 단색화도 함께 걸렸다. 면포에 암갈색(umber)과 청색(ultramarine)을 섞어 먹빛 가까운 짙은 물감을 큰 붓으로 푹푹 찍어 내려 그었다. 오묘한 번지기에 묘미가 있는데 그에게 청색은 하늘, 다색(암갈색)은 땅을 상징한다. 생전에 "장인(김환기)이 한국의 하늘을 그렸다면 나는 땅을 그리겠다. 내 필의 근원은 추사"라고 말했다.
유홍준 석좌교수는 “18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정선과 19세기 대표 서예가 김정희, 20세기 최고 추상화가 윤형근은 모두 붓을 쓰고 먹을 번지게 하는 데 대가였다”고 말했다. 겸재의 ‘백운동’, 추사의 ‘묵란’ ‘반야심경’ 등 출품된 40여점 중 윤형근 그림 일부만 S2A소장이고 나머지는 개인ㆍ기관 대여다. S2A는 한국 미술품 중 가장 비싼 가격인 약 152억원(수수료 포함)에 경매된 김환기의 ‘우주’를 갖고 있는 글로벌 세아의 전시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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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4월 2일부터 열리는 용인 호암미술관 겸재전의 짧은 예고편 격이다. 호암미술관에는 ‘연강임술첩’의 또 다른 버전인 홍경보 소장본이 출품될 예정이다. 겸재는 제일 먼저 그린 것을 갖고, 이후 다듬은 것을 홍경보와 신주백에데 나눠준 것으로 보인다. 전시된 화첩은 필세가 굳세고 먹의 농담 변화가 강하다. 나룻배를 기다리는 사람, 횃불을 밝혀 든 사람 등의 묘사도 자세해 거칠되 현장감이 강하다.
홍경보 본은 좀 더 정제돼 있고 당대 문인이 쓴 찬(해설)이 붙어 있다. 각각 개인 소장이라 좀처럼 전시되지 않은 명작을 연달아 볼 드문 기회다. 283년 전 겸재는 세 벌을 그려 나눠 가졌다고 적었는데, 신주백 소장본은 여전히 행방을 알 수 없다. 3월 22일까지,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