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일터에서 발생하는 죽음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난달 말 이재명 대통령은 산업재해 사망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에 비유하면서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고용노동부 장관은 “직을 걸겠다”고 했다.
정부는 노동자 보호의 범위를 넓히고, 산재 발생 기업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산업안전보건법 적용 범위를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 등으로 확대하고, 기업의 안건보건공시제를 단계적으로 도입하겠다고 했다. 중대재해 위반이 발생하는 기업은 공공계약 입찰에서 감점을 받고, 안전·보건조치 위반으로 다수의 반복 사망사고가 발생하면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노동자의 안전’ 문제가 국정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의 산재 사고가 많다는 뜻인 동시에 정부가 칼을 뽑아 들기 전에는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투자하지 않는 분야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정부가 산재 근절 의지를 밝힌 것은 환영할 일이다. 한국은 경제 규모나 소득 수준에 비해 산재가 압도적으로 많은 국가다. 2024년 기준 한국의 산재 사망률은 1만명당 0.39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0.29명보다 1.3배 이상 높다.
정부가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 무색하게, 일하다가 죽는 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 올해 상반기 산재 사망 노동자는 287명이다. 하루 평균 1.5명이 일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지난달 의령 고속도로 공사장에서 노동자가 천공기에 끼여 숨졌다. 불과 열흘 뒤, 의정부 아파트 공사 현장에선 또 다른 노동자가 추락사했다. 지난 19일엔 경북 청도군에서 선로 점검 작업 중 이동하던 근로자 2명이 무궁화호 열차에 치여 사망했고, 이틀 뒤엔 전남 순천의 한 레미콘 공장 탱크 내부에서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실제 사례에서 보듯 건설업이나 제조업같이 위험한 환경에 노출될 확률이 높을수록, 또 안전 조치를 강화할 여력이 없는 영세 사업장일수록 산재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위험한 일자리는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취업자들은 점점 고숙련·고임금 일자리를 찾으려는 선호가 뚜렷하고, 힘들고, 위험하고, 숙련도가 낮은 일자리는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나 이주노동자와 같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어렵고, 싼값에 쓸 수 있는 인력들이 이런 일자리를 채우는 경우가 많다. ‘위험의 외주화·이주화’가 나타나는 이유다. 이주노동자의 산재 사망비율은 국내 취업자보다 3배 이상 높다. 산재를 줄이기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가장 약한 고리를 튼튼하게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정부의 의지도 중요하고, 관련 제도와 엄벌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다. ‘산재와의 전쟁’은 기업들이 안전에 더 투자토록 하는 것 못지않게 ‘고되고 위험한 일에 대한 존중’을 높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값싼 노동 뒤에 숨겨진 사회적 비용은 결코 작지 않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은 최근 저서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생각의힘)에서 “일을 하다가 다치거나 목숨을 잃으면, 이때 그 영향은 단순히 노동소득의 손실을 넘어 노동자의 가족에게도 미치게 된다”면서 “하지만 이런 사회적 비용은 노동자들이 일의 대가로 받는 임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고가 생기면, 그 비용은 가족이나 사회가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이처럼 ‘나쁜’ 일자리에는 부정적 외부성이 있고, 노동시장은 이런 일자리의 비용을 과소평가함으로써 나쁜 일자리를 지나치게 많이 만들게 된다”고 했다.
산재를 줄이는 것은 국격을 높이는 일인 동시에,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목숨과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자리라고 해서 사회에서 중요하지 않거나, 위험해도 어쩔 수 없는 일자리인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보금자리나 산업 현장을 짓고, 위험에 대비해 고장난 곳을 수리하며, 가장 더럽고 힘든 환경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야말로 누군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일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이들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 사회 전체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만족도와 자부심이 올라갈 때, 한국 사회가 조금은 안전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