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통신] 카자흐스탄의 별이 된, 독립운동가의 후손

2025-08-04

광복 80주년인 올해 광복절을 앞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소식이 최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들려왔다. 항일독립운동가의 후손이자 카자흐스탄의 피겨 영웅인 ‘데니스 텐’의 이름을 딴 거리가 카자흐스탄의 최대 도시, 알마티에 생긴다는 뉴스였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시는 산하 7개 구청 관내에 156개 거리의 명칭 변경 계획을 심의에 부쳤는데, 여기에 ‘데니스 텐’ 거리도 포함된 것이다. 현지 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알마티시 당국은 “시내 주요 거리와 새로 생긴 도로에 문화, 과학, 역사 분야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부여될 예정”이라며 “데니스 텐 거리는 알마티시 보스탄디크 구 내 7번 거리에 부여될 것” 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을 접한 데니스 텐의 어머니 옥사나 텐은 “알마티 시내의 한 거리가 아들의 이름으로 명명된다면, 고인이 정말 기쁘할 것”이라며 “모쪼록 데니스가 사랑했던 대한민국도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추모해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고 말했다.

거리 명 부여는 8월 말쯤에 결정되는데,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는 “심의가 통과될 것으로 확신한다”면서 "알마티에 데니스 텐 거리가 조성되는 것은 그에 대한 카자흐스탄 국민의 사랑과 기억을 보존한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인의 위상을 높이는 큰 경사"라고 기대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 카자흐스탄의 피겨 스타가 되다

데니스 텐은 1993년 6월 13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태어났다. 항일독립운동가 민긍호 선생이 그의 외고조부이다. 민긍호의 친손녀인 민 세레나가 데니스의 할머니인 것이다. 대한제국 특무정교를 지낸 민긍호는 1907년 8월 일제가 군대해산조치를 내리자 원주 진위대 병사 300명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홍천·춘천 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1908년 2월 순국했다.

데니스는 다섯 살 때 피겨스케이팅 불모지 카자흐스탄에서 어머니의 권유로 피겨를 시작했다. 열악한 훈련 환경이었지만 꾸준히 기량을 키워, 열 살 때 러시아로 떠나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했다.

역경 속에서도 그의 재능은 빛났고, 마침내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 16세의 나이로 출전, 남자 싱글 부문에서 11위를 기록하며 국제 피겨 무대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경기 직전 소개 멘트를 통해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민긍호 장군의 후손”이라고 밝히며, 비록 국적은 카자흐스탄이지만 한민족의 정체성을 세상에 알렸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반 라이사첵의 지도자인 프랭크 캐롤 코치에게 지도를 받으며 세계 수준에 근접했고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2011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 게임 남자 피겨 싱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카자흐스탄의 피겨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때 여자 싱글에서는 최다빈이 금메달을 획득해 비록 시상대 위에 게양된 국기는 달랐지만, 남녀 싱글 금메달리스트가 모두 한국인 선수들이있다.

2013년 세계선수권 종합 2위, 2014년 소치 올림픽 동메달, 2015년 4대륙 선수권 우승을 기록하며 그는 세계 무대에 우뚝 섰다. 특히 소치 올림픽에서 획득한 메달은 카자흐스탄 동계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피겨 메달이었다. 그는 단순한 운동 선수가 아니라 국가적 자부심이자, 카자흐스탄의 청년들에게 꿈을 심어준 롤모델이었다.

평창올림픽 금메달 후보 1순위, 그러나…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후보로 제일 먼저 손에 꼽혔다. 그러나 그는 대회를 앞두고 오른발 인대를 다치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고 만다. 그에게 평창은 단순한 올림픽 대회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조국에서 열리는 대회였기에 데니스는 평창 올림픽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고, 심각한 발목 부상과 고관절 통증에도 불구하고 참가 자격을 얻기 위해 국제 대회에 출전했다.

결국, 평창 올림픽 무대에 섰지만, 장염과 감기까지 겹친 악조건 속에서 프리 프로그램 진출에 실패했다. 경기 후 그는 “이 무대에 선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며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의 슬픈 미소는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데니스를 떠올릴 때마다 그가 경기 때마다 가지고 다니던 아주 조그마한 조약돌이 생각난다. 그는 이 작은 돌멩이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 돌이 뭐냐는 나의 질문에 "한국에 경기하러 갔을 때 원주에 있는 할아버지 묘소에서 가져온 돌이다"라고 하면서 "이 돌을 만지면서 나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할아버지가 나를 잘 지켜줄 것이다고 생각하며 경기 시작전에 고조된 긴장을 푼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또 “카자흐스탄은 내가 태어난 조국이지만 한국도 나의 조국이죠. 내겐 한국인의 피가, 자랑스런 독립운동가 민긍호 할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잖아요”라고 말했던 것이 또렷이 기억이 난다. 항일정신을 가슴에 품은 고려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스스로를 늘 “두 조국을 사랑하는 한국계 카자흐스탄인”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지 7년이 지났지만 데니스를 생각할 때면 항상 의젓하고 기품있으면서도 늘 미소 띤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갑작스러운 비극, 그리고 국가적 추모

데니스는 평창올림픽에서의 불운에 이어 그해 7월 19일, 알마티 시내에서 고급차의 사이드 미러를 훔치던 좀도둑이 휘두른 흉기에 찔리는 비극을 겪게 된다. 가해자들이 찌른 부위는 허벅지를 지나는 대동맥이었고, 과다출혈로 결국 운명을 달리하고 만다. 이날 오전까지도 연습을 하며 새 시즌을 준비하던 그였다.

비보가 전해지자 카자흐스탄 전역은 충격에 빠졌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3일 동안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모든 오락 프로그램이 결방되었고 방송은 흑백으로 전송되었다. 장례식은 데니스가 유년기에 훈련했던 발루안 샬락 실내 링크에서 엄수되었으며, 인근 도로까지 늘어선 수많은 추모객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그를 카자흐스탄의 피겨 스타라는 단어로 말하기에는 그의 위상이 너무나도 높았음을 그의 장례식이 역설적이게도 보여주었다.

1주기에는 알마티 도심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정부는 그의 이름을 딴 국제 피겨 대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 옥사나씨는 아들의 이름을 딴 ‘데니스 텐 아카데미’라는 피겨 꿈나무 교실을 설립하여 제2, 제3의 데니스를 꿈꾸는 어린 피겨선수들을 키워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의 거리 위에도 그의 이름이 새겨지게 되었다.

우리도 그를 기억해야 한다

‘데니스 텐 거리’ 명명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러시아의 귀화 제의를 거절하고, 피겨 약소국의 불리함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한 그의 삶 자체를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 한 고려인 청년을 통해 고려인 동포들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더불어,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국내 산업현장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12만이 훌쩍넘는 재한 고려인 동포들을 우리 사회의 진정한 구성원으로 포용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한국을 사랑했고, 그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한 데니스 텐. 그가 짊어졌던 두 조국, 카자흐스탄과 대한민국이 함께 그를 기억해야 한다.

거리 위의 그의 이름이,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숨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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