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반도체 시장 세계 1위인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가 600억 달러(약 82조 원)에 달하는 미국 내 신규 투자 계획을 내놨다. 마이크론·글로벌파운드리스에 이어 TI까지 투자 규모를 늘리며 도널드 트럼프 정권 ‘눈치보기’에 나섰다는 평가가 따른다. 미국 기업들의 선제적인 투자 발표가 이어지는 데 따라 이미 미국 투자 부담이 큰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000660)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18일(현지 시간) TI는 텍사스와 유타 내 3개 지역 반도체 제조시설 7곳에 6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 중 400억 달러 이상은 텍사스 셔먼에 위치한 ‘메가 사이트’에 투입된다. TI는 이를 통해 6만 명에 달하는 고용이 창출된다며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 기초 반도체 투자”라고 강조했다.
TI는 구체적인 투자 완료 시점과 목표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투자 대상지로 안내한 3곳도 이미 공장이 운영 중인 곳이다. 로이터는 TI의 발표에 기존 계획한 투자금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기존 알려졌던 금액 대비 신규 발표한 투자액이 3배 이상 크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TI는 조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인 지난해 12월 180억 달러를 미국 내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발표에는 추가적인 설비 확충·공장 신설 계획이 포함됐을 공산이 크다.
TI 외 타 미국 대표 반도체 업체들이 최근들어 자국 내 대형 투자를 속속 발표하고 있다는 맥락도 흥미롭다. 최근 마이크론은 미국 내에 20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발표 대비 300억 달러가 늘어난 수치다. 글로벌파운드리스 또한 이달 초 160억 달러를 뉴욕주 말타와 버몬트주 에식스 정션에 위치한 기존 공장 확장에 투입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테크계는 미국 반도체 기업이 투자 확대라는 ‘정치적 선물’로 트럼프의 칩스법(반도체지원법) 폐지 시도를 달래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본격 추진한 칩스법을 백지화하거나 지원 기준선을 높이겠다는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이날 로이터는 “마이크론과 TI 등의 투자는 반도체 보조금 지급 계획을 백지화할 가능성을 언급한 트럼프 정부의 위협에 응답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최근 미국 내 투자 강화를 천명한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미국 내 일자리 확보’와 ‘미국 기업과 협력’을 강조한 점에서도 정치적 고려가 읽힌다. 이날 TI는 “애플, 포드, 엔비디아, 스페이스X와 같은 미국 유수 기업들 및 정부와 협력해 미국 혁신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게 돼 영광”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역시 칩스법 수혜에 기대 미국 현지 투자에 나섰던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에 각각 파운드리·패키징 시설을 건설 중이다. 테크계 한 관계자는 “비록 과대포장된 수치일지라도 미국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투자 규모를 늘리고 있어 한국 기업들도 따라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클 것”이라면서도 “투자금을 늘려도 트럼프가 자국 우선주의로 한국 기업을 지원 대상에서 배제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여전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