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땅서 이룬 조선 강국…경제·안보·기술 '3각함대' 발진 [대한민국 '트리거 60']

2025-10-12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60' ㊴ K조선의 약진

#1 1965년 5월 미국 뉴욕. 현지를 국빈 방문 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신동식(현 한국해사기술 회장) 미국선급협회 검사관을 만났다. 5·16 군사정변 직후 대한조선공사 기술고문으로 일했던 신 검사관은 당시 미국에서 각종 선박과 해양시설이 기술 조건 등에 맞는지 확인하고 인증하는 일을 했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데 배를 만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중화학공업 육성책의 하나로 조선산업을 일으키겠다는 계획을 품고서 한 얘기였다. 신 검사관은 두말없이 귀국해 청와대 경제2수석이 되어 조선공업 발전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2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98년 6월 경남 거제시 옥포조선소. 미국 트럼프 그룹의 도널드 트럼프 회장이 외쳤다. “세상에, 저게 뭐냐(What the hell is that)?” 세계에서 제일 큰, 높이 103m짜리 골리앗 크레인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트럼프 회장은 대우그룹 초청으로 방한해 대우의 주요 사업장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크레인에 올라 선박 건조 과정을 보면서도 연신 감탄사를 던졌다. “어메이징(Amazing)!” “원더풀(Wonderful)!” 그날 한국의 조선산업은 트럼프의 머릿속에 잊히지 않는 기억을 새겼다.

#3 박정희 대통령이 신동식 검사관을 만나고 60년이 흐른 올해 8월 26일(현지시간) 미국 필라델피아 필리조선소. 미국 해사청이 발주한 국가안보다목적선(NMSV, 훈련·구조·병력 수송 등에 두루 쓰이는 선박) ‘스테이트 오브 메인(State of Maine)호’ 명명식이 열렸다. 한국과 미국이 협력해 만든 배였다. 연단에 오른 이재명 대통령은 “한국의 조선업이 이제 미국의 해양 안보를 강화하고 미국 조선업 부활에 기여하는 새로운 도전의 길에 나서게 됐다”며 “한·미 동맹은 안보·경제·기술 동맹이 합쳐진 ‘미래형 포괄적 전략 동맹’의 새 장을 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도, 자본도 없이 조선산업의 꿈을 키운 지 60년. 한국은 세계 최고 기술국이 됐다. 미국이 이른바 ‘마스가(MASGA·미국 조선산업 부흥)’ 프로젝트와 군함 제조·정비 파트너로 한국을 점찍을 정도다. 2010년대까지는 선박 수주·건조에서 한국이 세계 1위였다. 2020년대 들어 양적인 면에서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에 밀렸다지만,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처럼 첨단 기술이 필요한 고부가가치 선박은 여전히 한국이 세계 최고다.

박태준, 조선소 후보지로 울산 추천

조선산업은 우리가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시피 한 사례다. 60년대 후반 들어 정부는 조선업을 키우려 했으나 나서는 민간 기업이 없었다. 지원을 약속해도 기업들이 머뭇거리자 때론 은행 대출을 죄겠다고 으름장도 놨다. 그 와중이던 69년, 정주영 현대 회장이 결단을 내렸다. 그가 일으킨 건설업처럼 조선산업도 노동집약적이라는 점에 자신감을 얻었다. ‘배를 만든다는 것은 건설업에서 하는 토목·건축기계설비·전기공사를 결합한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명민한 두뇌와 성실한 노동력은 국내에 넘쳤다. 기술이 없다지만,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68~70년) 경험했듯 기술을 익히면서 만들어 나가는 것은 한국인의 장기 아니던가.

조선소 후보지는 울산으로 잡았다. 박태준 당시 포항제철(현 포스코) 사장에게서 “배를 만들려면 두껍고 무거운 강판(후판)이 필요하다. 포항에 제철소가 들어서는데, 가까운 울산에 자리를 잡으면 후판 물류비용을 아낄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서였다.

자금 확보는 쉽지 않았다. 국내에 돈이 없어 차관을 들여오려 했으나 모두 “무모한 도전”이라며 꺼렸다. 결국 정 회장이 특유의 도전정신을 발휘해 해결했다. 71년 영국 핵심 관계자를 만나서는 500원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이며 “우리는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든 나라”라고 설득해 차관을 얻었다. 같은 해 말에는 그리스 선사 선엔터프라이즈의 조지 리바노스 회장을 만나 조선소가 들어설 백사장 사진과 유럽 업체에서 받은 유조선 설계도면을 보여주고 당시 세계 최대인 26만t 유조선 2척 건조 사업을 따왔다. 울산조선소 기공식(72년 3월)이 열리기 석 달 전의 일이었다.

기술은 유럽·일본의 장비를 들여오면서 현지 연수를 통해 익혔다. 쉽지는 않았다. ‘호랑이 새끼를 키우지 않겠다’고 생각했음일까. 상대는 까다로웠다. 설계 도면 등은 볼 수만 있을 뿐, 촬영은 물론 스케치도 막았다. ‘눈대중으로 설계도면을 외우고, 도크 실제 크기를 발걸음으로 잰 후 밤이면 숙소에서 담배 은박지에 이를 그렸다. 이걸 속옷 안에 넣어 가까스로 한국에 가져왔다.’(『현대중공업그룹 50년사』)

조선소를 지으면서 동시에 배를 만들었다. 조선소 준공(74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처음 수주한 26만t급 유조선들을 진수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때 한국은 “값싸고 튼튼한 배를 빨리 만든다”는 정평을 얻었다. 수주가 몰렸다. 울산조선소 준공 9년 만인 83년, 현대중공업은 세계 최대 선박 건조회사가 됐다. 다시 10년 뒤인 93년 한국은 국가별 수주 점유율 46.4%로 일본(31.7%)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태평양전쟁 때 이미 항공모함을 만들었던 일본을 누른 것이다.

한국이 개발한 ‘1도크 다(多)선박 건조’는 특유의 스피드를 더했다. 도크란 조선소의 선박 건조·수리 시설이다. 그때까지는 도크 하나에서 선박 한 척을 만드는 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작은 배의 경우 하나의 큰 도크에서 여러 대를 동시에 만들어 속도를 높였다. 선박의 조립 단위인 ‘블록’을 대형화하는 등 다른 방면에서도 혁신을 일으켰다. 특유의 근면성에 창의적 두뇌가 어우러져 한국 조선산업을 세계 1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여기에 LNG 운반선과 초대형 해양 플랜트 같은 새 기술이 더해져 한국은 2010년대까지 세계 조선 1위를 질주했다. 그러면서 배를 만들 때 필요한 기계·전기·전자 등 이른바 ‘후방 산업’까지 약진했다.

군함 건조 역시 맨주먹으로 시작했다. “아시아 국가는 스스로 안보를 책임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69년)이 발표된 이후 한국 정부는 자주국방을 내세웠다. 그러나 소총도 못 만들던 시절에 군함 건조 기술이 있을 리 만무했다. 잠수함을 수입하며 제조사에 연수를 가는 식으로 기술을 하나둘 익혔다. 그렇게 1번 잠수함인 1300t급 장보고함만 수입했을 뿐, 2번 함부터는 스스로 만들었다. 이제는 최첨단 이지스함까지 척척 만드는 나라가 됐다.

‘해양굴기’ 기치 세운 중국의 도전

한편에선 중국이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95년 울산조선소를 보고 간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한국형 모델을 배우라”고 지시했다. 중국 조선산업은 자국 내의 막대한 발주 물량과 무한에 가까운 금융 지원에 힘입어 이젠 수주량 기준 세계 1위가 됐다. 중국은 언젠가 태평양에서 미 해군 전력을 넘어서겠다는 ‘해양굴기(海洋堀起)’를 내세우며 조선 경쟁력 강화에 더 힘을 쏟고 있다.

이제 한국 조선업체들은 새로운 확장 전략으로 ‘글로벌 파트너십’을 택했다. 기술 이전과 현지 공동생산을 통해 글로벌 조선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미국과의 마스가 프로젝트가 한 예다. HD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등은 인도 조선업체와 비슷한 협약을 맺었다. 이신형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단기 수익보다 국가 위상과 공급망 주도권을 고려한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파트너로 삼은 나라가 친한 이웃을 새 고객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의미다.

신동식 회장은 “조선산업은 단순한 수출 산업이 아니라 국가 안보 자산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군사 안보는 물론이다. 유조선과 LNG 운반선은 에너지 안보의 기반이다. 한국처럼 많은 무역 물자를 배로 실어 날라야 하는 나라는 경제 안보까지 조선산업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 미국이 어떻게든 조선산업을 다시 일으키겠다고 부르짖는 이유다. 신 회장은 “전 세계 군함·LNG선·해양플랜트의 상당 부분이 한국 기술에 의존하고 있는 지금, 조선 기술 주도권은 외교·안보 영향력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산림녹화 프로젝트’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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