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삐용 의자’의 유쾌한 반란

2025-08-24

TV 화면 속 나무 의자는 앙상했다. 얼기설기 투박한 모습은 자체의 무게도 감당하기가 버거워 보였다. 방송 진행자가 법정 스님이 손수 만들고 ‘빠삐용 의자’로 이름 붙였다고 소개했다. 스님이 영화 ‘빠삐용’에서 받은 영감으로, 의자에 앉을 때마다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고 한다. 물신주의에 휩쓸려 인간이 먼저인지 돈이 먼저인지 분별력이 흐려진 시대에 청정한 마음의 세계를 향도한 스님이 떠올랐다. 그러나 불안감이 커지고 조마조마했다.

지난 2일 KBS ‘100인의 판정단에 묻는다’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든 심정이다. 대한민국과 국민에게 용기를 준 분들의 애장품을 소개하며 얽힌 사연과 의의를 찾는 프로였다. 하이라이트는 시민 방청객 100인과 9명의 전문가가 각각 감정단이 되어 애장품의 가치를 ‘돈으로 추정’하는 거였다.

TV 쇼에 나온 법정 스님 의자

시민 감정단이 가격 책정 거부

무소유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법

불안감은 스님의 수행과 함께한 ‘빠삐용 의자’를 돈으로 환산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이었다. 황금 지상주의 사고방식이 KBS라는 공영방송 화면에까지 이르고, 비인간적으로 팽창을 거듭한 돈의 제국이 온 곳에서 인간을 압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기에 잘 사는 나라가 되려고 절실하게 노력했고, 그 덕에 세계 10위 권에 도달하는 압축 성장의 기적을 이루었으니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가난의 구제와 풍족한 생활 향유에 그치지 않고 모든 것을 돈이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천민자본주의의 포로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파트 가격이 하락한다는 이유로 해괴한 일들이 벌어진다. 일반 아파트단지를 거쳐 통학하던 임대아파트 아이들의 통학로를 막고 담장을 쌓는 일이 발생한다. 심신장애 아이들을 위한 교육 시설을 못 짓게 하여, 장애우 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일이 대명천지에 일어나고 있다. 화장장, 쓰레기 소각장과 같은 편의시설을 만들 수 없도록 하는 일도 허다하다. 돈 때문에 부모와 가족을 죽이는 천인공노할 사건이 빈발한다. 4살 유아 영어반과 7살 의대 준비반이 아이들의 꿈을 위해서가 아니라 못난 어른들의 돈에 대한 망상 때문에 만들어진다.

돈에 혈안이 된 세상은 미국의 관세정책으로 요동치고 있는 국제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전권을 휘두르는 관세율 책정으로 1995년 1월 1일에 설립되어 166개국의 다자무역규범 체계를 유지해 온 세계무역기구(WTO) 같은 국제기구는 입도 벙긋 못하고 사망한 꼴이다. 오랜 동맹의 신뢰 관계도, 국제외교의 협상 질서도, 자유주의 무역 철학도 퇴장했다.

2000여 년 전 사마천은 “천하 사람들이 기꺼이 찾아오는 것도, 어지러이 달려가는 것도 모두 이익을 좇아가는 것이다”(『나를 세우는 옛 문장들』, 김영수)라고 했다. 하물며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의 비중이 비대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그러나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령 진정한 사랑의 마음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로미오와 줄리엣의 목숨을 바친 사랑을 돈의 액수로 이해하는 건 불가능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다 바위가 되고, 나무가 되고, 꽃이 된 아내와 신랑의 이야기가 주는 아쉬움과 감동은 억만금으로도 얻을 수 없다. 이런 가치가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고, 공생적 교감으로 행복을 이해하고 공유하게 하는 것이다.

다행히 ‘빠삐용 의자’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감정단의 한 사람은 “스님의 의자를 돈의 단위로 나타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천억 원쯤으로 평가하고 싶으나 무소유를 실천하며 우리 사회에 큰 가르침을 준 스님께 꾸중 들을 것 같다며 돈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했다. 시민 감정단과 전문가 집단도 마찬가지 결론이었다.

‘빠삐용 의자’를 돈으로 판정하지 않은 것은 유쾌한 반란이었다. 반가웠다. 돈 앞에 조아리며 ‘예스’라고 하는 시대에 ‘노’라고 외친 거였다. 욕망과 탐욕의 소유가 난무하는 시대에 ‘무소유가 온 세상을 갖는 제일 큰 소유’(『무소유』, 법정)라고 한 스님은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히지 말고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서 만족할 줄 알 때 내적 평온과 맑은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스님은 그래야 ‘자기답게 살 수 있다’고 했다. “세상 흐름대로 따르다 보면 자기 빛깔도 없어지고 자기의 삶도 없어진다 (…)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자기답게 거듭거듭 시작하며 사는 일이다.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로부터, 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산에는 꽃이 피네』, 법정) 유쾌한 반란이 널리 널리 펴지면 좋겠다.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커뮤니케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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