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 전, 뉴욕타임스는 21세기 최고의 영화 100편을 선정해 발표했다. 제작자, 작가, 배우 등 영화산업 종사자 500명에게 각자 ‘톱 10’을 뽑게 한 뒤 이를 합산한 결과였다. “왜 이 영화가 포함됐지?”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왜 없지?” 등등의 독자 불만과 논란이 뒤따랐다. 그러자 뉴욕타임스는 독자들의 선호를 반영한 별도의 리스트를 만들기로 했다.
눈에 띄는 점은, 영화 <기생충>이 영화계 종사자 리스트에서 1위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 투표에서도 1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이를 보고 나는 <기생충>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등 유사한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왜 미국에서 이토록 큰 반향을 일으켰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왜 하필 <기생충> 같은 복잡하고 어두운 영화가 그토록 주목받는 걸까?
그 이유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이다. <기생충>은 21세기 자본주의의 핵심 특징들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한국 사회와 미국 사회가 공유하는 기묘한 평행선을 건드렸기에 공감을 얻은 것이다. 첫째, 두 나라 모두 극심한 불평등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미국은 1970년대부터, 한국은 다소 뒤늦게 이 흐름에 합류했다. 문제는 불평등이 특정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스타그램 피드에서부터 사치품에 이르기까지, 부자와 유명인의 삶은 끊임없이 우리 눈앞에 던져진다. 상류층은 중하층과 철저히 분리된 삶을 살며, 주로 서비스 제공자를 통해서만 교류한다. <기생충>의 반복되는 모티프 가운데 하나는 부유하고 젊은 사장이자 가장인 박동익(이선균)이 자신의 운전기사와 지하철에서 풍기는 냄새를 도저히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더 두드러진다. <기생충>에서 주거와 자녀 교육은 턱없이 비싸고, 그들의 생활 환경은 마치 디스토피아를 연상시킨다. 영화 첫 장면에서 감독은 김기택의 가족이 사는 반지하 방을 소개한다. 휴대전화 신호조차 잘 잡히지 않고, 홍수가 나면 물에 잠기고, 해충이 들끓고(소독 연기를 맞아야 하고), 밤마다 술 취한 행인들이 소란을 피우는 곳이다.
둘째, 두 사회 모두 강력한 개인 책임 윤리를 강조한다. 튼튼하고 포용적인 사회안전망이 구축된 사회에서 가난을 겪는 것과 사회안전망이 부실하고 대중에게 외면당하거나 심지어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가난을 겪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미국이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 유동적인 사회 이미지를 키워온 것처럼, 한국 역시 많은 것을 기대하며 특히 남성들에게 더 큰 부담을 지운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대 간 계층 이동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특히 미국의 경우 그렇다. 기회는 학벌과 자격증 등 증명서를 가진 이들이 독점한다. 이는 <기생충>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셋째, <기생충>은 하층민들이 서로를 적으로 삼아 싸우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배우 송강호가 열연한 김기택은 기회를 잡자마자 기존 가사도우미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가족을 채워 넣으려는 계략을 꾸민다. 그러나 가사도우미 국문광(이정은) 역시 극한까지 맞서 싸운다. 지하실에 숨어 지내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남편으로, 왜곡된 충성심에 사로잡힌 채 그곳에 갇혀 살아간다.
봉 감독이 자신의 캐릭터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부자들은 명백한 기생충이며, 감독은 박 사장 아내 연교(조여정)의 피상적이고 허무한 모습, 나아가 무력함까지 집요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그들의 시중을 드는 이들은 영리하긴 해도 특별히 매력적인 존재는 아니며, 감독은 김기택이 자신의 곤경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영화의 결말은 복수 판타지로 치닫는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는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 정치문화에 스며든 좌우 양쪽의 포퓰리즘 요소를 반영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러한 현상을 기묘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는 억만장자임에도 늘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주장하며, 그의 충성스러운 지지층 역시 같은 피해의식을 공유한다. 그리고 트럼프는 이 불의를 바로잡으려 한다.
이 어두운 영화에서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김기택의 자식들인 김기우와 김기정으로 대표되는 다음 세대의 재치와 기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기우가 던지는 질문 “내가 이곳과 어울리냐”는 그대로 남는다. 그 답이 ‘아니요’라면, 우리 모두의 처지는 훨씬 더 악화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