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플레이브의 K팝 콘서트는 비틀즈의 셰이 스타디움 공연에 견줄 만한 역사적 순간으로 평가될지도 모른다. 무대에 선 것은 모션 캡처로 구현된 다섯 명의 ‘버추얼 아이돌’이었지만, 객석은 환호와 눈물로 가득 찼다. 세계 최초로 매진된 버추얼 아이돌 단독 콘서트, 새 장르의 출발이었다. 여기에 최근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전 세계 차트를 휩쓸며 K팝은 국경을 넘는 세계적 신화로 자리 잡았다.

아이돌(idol)의 어원은 그리스어 ‘에이돌론(환영·그림자·허상)’이다.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가장 기발한 ‘에이돌론 서사’는 유리피데스의 ‘헬레네’(사진)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었던 헬레네를 재해석했다. 트로이에 끌려간 것은 헬레네가 아니라 헤라 여신이 빚어낸 환영이었고, 진짜 헬레네는 이집트에 무고하게 갇혀 있었다는 설정이다. 최초의 공상과학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천 척의 배를 출항시킨 미모’가 가상 아이돌이었다는 역설을 통해, 허상의 힘을 드러냈다. 그래서 플라톤은 진리와 거리가 먼 에이돌론이 인간을 현혹해 혼란을 낳는다고 보았다. ‘아이돌’은 라틴어 ‘이돌룸’ 을 거쳐 성경 번역에서 ‘우상’으로 자리 잡으며 거짓 신과 헛된 숭배의 대상을 뜻하게 됐다. 서양사에서 아이돌은 기만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공지능 시대의 아이돌은 이러한 불신을 뒤집는다. 플레이브의 가상 멤버들은 실체 없는 이미지이지만, 인간적 한계를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영웅으로 재탄생되었다.
세계가 한국 문화를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는 지금, 우리 정치도 새 걸음을 디디고 있다. 헬레네의 환영이 전쟁을 불러왔듯, 이미지가 실체와 괴리될 때 파국이 뒤따른다. 우리는 한류의 위상을 뒷받침할 민주적 성숙을 증명해야 한다. 젊은 세대들에게 아이돌을 뛰어넘는 가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