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모든 ‘말’ 기록하는 속기사가 ‘작은 목소리’에 집중하는 이유

2024-09-14

“위원장의 ‘의석을 정돈해 주시기 바랍니다’ 멘트와 함께 업무도 시작되죠.”

10년 차 속기사인 김은희 주무관(35)은 속기사의 하루 루틴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산회가 선포되면 의원들은 회의장을 빠져나가지만, 속기사의 업무는 끝나지 않는다. 실무 속기사가 현장에서 발언을 기록하고, 몇 차례의 검수를 거쳐 보완한 뒤에야 회의록이 일반 국민에게 공개된다. 본회의, 상임위원회 회의, 청문회, 국정감사 등 국회의 모든 의사 일정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이들이 ‘속기사’다.

“‘내가 한 말을 취소하겠다’고 말하면 ‘내가 한 말 취소해주세요’라는 말까지 다 들어가요.” 김 주무관은 어떤 발화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최대한 포착해 그대로 기록하는 일이 속기사의 일이라고 했다. 설전이 벌어질 때는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더 작은 사람의 말에 집중한다. “목소리 큰 사람의 말만 들어가는 경우는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육아휴직 후 3년 만에 국회에 돌아온 김 주무관을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에서 만났다.

- 일반 타자기와는 다르네요.

“일반 자판기는 자음·모음 두벌식이지만, 속기사들이 쓰는 건 초성(왼쪽)·중성(가운데)·종성(오른쪽) 세벌식으로 한꺼번에 치는 방식이에요. 다만 한 번에 치면 속도를 못 내서, 많이 사용되는 활용형은 약자로 써요. 가령 ‘ㅎ·ㅁ·ㅂ·ㄴ’을 동시에 눌렀다 떼면 ‘했습니다’가 입력되고, ‘ㅇ·ㄴ’은 ‘의원’이 됩니다. 속기사마다 각자가 쓰는 약어가 있기도 해요. 단타로 치는 경우도, 약자를 많이 쓰는 경우도 있고요. 모니터에 문장 세 줄 정도가 나오는데 거의 안 봐요. 말하는 사람의 ‘입’을 보는 게 제일 정확하거든요.“

- 속기사는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합니다.

“회의 일정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요. 실무 속기사가 회의장에서 보고들은 대로 기록한 원고가 초고인데요. 사무실에 돌아와 현장 상황과 발언자, 답변자를 다시 확인하는 번문 작업을 거칩니다. 인명, 지명, 숫자 등 발언 내용이 정확한지도 확인하죠. 속기사들이 쓴 원고가 취합되면 편집 담당자가 1차 수정하고 이 원고를 속기사가 다시 고쳐 담당 계장에게 검수받는 일, 여기까지가 실무 속기사의 주 업무입니다.”

- 현장 기록이 끝이 아니네요.

“현장 속기가 업무의 20%라면 나머지 80%는 1차 편집 라인, 2차 담당 계장의 검토를 거쳐 정확성을 기하고 회의록을 등록, 발간하는 일입니다. 사무실에선 의원의 발언을 되짚으며 정확한 워딩(자구)이 무엇인지 묻는 통화가 종종 들립니다. 단어 하나, 조사 하나에도 내용이 달라질 수 있거든요. ‘내가 서명한 원고는 내가 책임진다’는 의식으로 모든 속기사가 일하고 있어요.”

속기사는 눈과 귀를 열어두고 떠도는 말들을 타자기에 붙잡아둔다. 말뿐만이 아니다. 회의 내용의 이해를 돕는 데 필요하다면 비언어적 행동, 상황에 대한 간략한 설명도 기록한다. 의원 간 삿대질이 오가면 ‘손가락질하는 위원 있음’ 등으로 표기하고, 본회의장 의원석에서 나온 발언에 대한 반응이 있으면 속기사의 손도 바빠진다. 속기사들은 이러한 ‘맥락’은 인공지능(AI)도 쉽게 잡아낼 수 없다고 자신한다.

- 국회는 말의 향연입니다. 기록하는 데 팁이 있다면요?

“내용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가 발언했는지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참석자 얼굴이 담긴 명단이 공유돼도 사진과는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저만의 팁이 있다면 귀 모양을 비교해 보는 거예요. 사람마다 귀 모양이 다르고, 변하지 않는 부분이거든요. 신입 때는 선배들이 넥타이로 구별하라고 알려줬어요. 파란 나비 무늬, 곰돌이 넥타이, 이런 식으로 기억하는 거죠. 그런데 참석자들이 다 넥타이를 매는 거예요. 이건 아니다 싶어 귀, 헤어 스타일 등을 보게 됐어요.”

- 여야 공방이 가팔라지면서 22대 국회는 어느 때보다도 바삐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때는 2교대 24시간 근무를 했어요. 아침 9시에 출근해 다음 날 아침 9시에 퇴근했죠. 교대 근무가 이어지는 와중에 상임위에선 인사청문회가 진행돼서 나중엔 필리버스터 하나만 하는 게 수월하다고 느껴지는 지경으로 업무가 과중했어요. 자정을 넘겨 퇴근하는 일이 잦아 2살, 4살 두 자녀의 하원은 조부모님 몫이 됐네요. 새벽에도 차례로 본회의장에 들어가는데 책상 위에 잠시 엎드려 휴식을 취하는 직원도 있고, 잠들어 시간을 놓칠까 봐 서로 깨워주기도 했습니다.”

- 국회에서 여야 의원 간 설전이 오가는 풍경도 자주 보입니다.

“‘원고가 탔다(시끄러웠다)’고 하는데요(웃음). 두 사람의 발언이 맞물리는 경우엔 목소리가 더 작은 사람의 입을 봅니다. 큰 목소리에 귀가 가지만, 나중에 녹음을 들어 기록하면 되거든요. 여러 사람의 말이 엉킬 땐 누가 말한 단어 하나, 또 다른 누군가가 말한 단어 하나, 이런 식으로 기록해 추후 보완합니다. 누구 목소리인지 알아둬야 하니까요.”

- 정신을 집중해 기록하다가도, 발언 내용에 마음이 움직일 때는 없었나요.

“최근 예결위 종합정책질의에서 속기하다가 눈시울을 붉혔어요. 한 의원이 ‘의료대란’ 관련 질의를 하던 중 의사인 친구가 보내온 메시지를 읽었는데요. 그 친구분이 아내의 암 투병으로 급히 찾았던 응급실에서의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본인이 의사인데도 이 정도인데, 일반 국민이 느낄 참담함에 대한 소회를 전하는 내용이었어요. 의료체계 정상화가 하루빨리 이뤄지면 좋겠습니다.”

김 주무관은 세월호참사 유가족, 휠체어를 타고 산소통을 단 채 국회에 증언하러 온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 아동의 발언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한국사회의 중요한 순간들은 속기사들의 손을 거친 기록을 통해 보존됐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최근 국회 속기사들과 식사한 뒤 이들과 악수하며 “우리나라 역사를 기록하는 속기사들의 손을 하나씩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 주무관은 “대의 민주주의, 민의의 전당인 국회 회의야말로 기록물로 남겨 보전할 가치가 있고, 내가 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22대 국회를 향해선 “협치를 통한 의정 활동이 이뤄지길 바란다”며 “국민이 바라는 정치 역시 결국 협치의 정치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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