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110주년…미공개 회의록으로 본 ‘위기극복 리더십’ 〈3〉

“토요일 오후 현대전자 다녀왔는데, (현대종합)목재는 확인 안 해봤나? 새 건물을 지으면 따라가서 뭐 납품할 게 있나 보고 협력하라고 했는데, 아무런 추진이 안 됐다.”
1984년 7월 9일 현대그룹 사장단 회의. 시작과 함께 정주영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무 책상 이야기했었다. 같은 값이면 철제보다 더 고급스러워 보이니 그렇게 공급하자고 했는데 왜 실행을 안 했지? 물건을 구매할 때, 그룹 내에서 조달이 불가능할 때만 외부에서 사라고. 두 회사(현대전자·현대종합목재) 모두 시말서 제출하라.”
현대그룹 사장단 회의는 종종 ‘무덤’과도 같았다. 현장을 직접 챙기고 잘 아는 정 회장의 스타일 때문이었다. “내가 다녀왔는데…” “내가 가봤더니…”로 시작되면 타깃이 된 계열사는 대개 진땀을 흘려야했다. 한 계열사 사장이 얼이 빠져 나가다 캐비닛을 문으로 착각해 열고 들어갔다는 후일담도 있을 정도였다.

이날도 예외가 없었다. 이윽고 현대정공으로도 불똥이 튀었다. “현대정공 사장 나왔나? (예, 나왔습니다.) 미국에서 컨테이너 하우스를 수주했지? 내가 공장에 갔을 때 출입구 발판이 아연도금 처리돼 있었는데, 너무 형편없었다. 어디서 했냐고 물어봤더니 외부에 맡겼다고 하던데, 현대중공업 옆에 도금 공장 있는데 왜 굳이 외부에 맡겼나? 우리 쪽에서 더 잘 만들 수 있는데 왜 외부에 맡겨서 형편없이?”
현대강관 차례였다. “자재 관리나 제품 관리에 대한 교육은 잘 이뤄지고 있나? 지난 번에 공장과 창고를 전부 둘러봤더니, 제품들이 시뻘겋게 녹슬어 있어. OOO 부사장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걸 그때 느꼈어.”
“본사에서는 공장에 가면 사무실에서 얘기만 하지 말고 공장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직접 확인도 하고 재고를 줄일 수 있는 방법도 연구하라. 노력하면 (재고를) 줄일 수 있고 그게 곧 이익인데, 거기 가서 저 아래 겨우 과장 정도나 만나고 오는 모양이다. 그게 본사야?”
“혼자 쥐고 있지 말고 기술자에게 물어라”

정 회장은 어려운 때일수록 현장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유명한 그의 말 “한 번 해봤어?”도 현장을 강조한 철학이 담겨 있다. 그는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실패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어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때는 그에 대한 원인이 있기 마련”이라며 “그 이유를 극복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다. 현장에 가면 구경만 하지 말고, 반드시 목적을 파악하고 개선하라”(1984년 9월 17일)라고 지시했다.
같은 해 11월 26일 그가 계열사인 인천제철 임원과 나눈 대화에는 이런 면이 잘 드러나 있다. 정 회장은 “인천제철은 시설 빨리 개선해서 명년에는 H빔(건축에서 건물의 뼈대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H모양의 강철기둥)을 꼭 계획대로 내놓아야 한다. 언제쯤 완성되나”라고 물었다. 인천제철이 수압으로 쇳물을 받아내는 시설을 미쓰비시에서 들여오는 데 8개월이 걸린다고 답하자 이런 대화가 오갔다.
▶정 회장=“그걸 우리가 여기서 만들지, 뭐 하러 일본까지 가서 해오나.”
▶인천제철=“그건 저희가 못 만듭니다. 그 안에 물을 통과시켜 냉각을 시켜야 하고, 그 통로 부분을 동(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국내 제작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정 회장=“그렇게 혼자 어물거리지 말고 (현대)엔지니어링 OOO 부사장이랑 상의해라. 견본 보고 만들면 되지 않나. 우리도 만들 수 있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왜 기술자도 아닌 당신이 혼자 붙들고 있나. 내가 항상 얘기하지 않았나. 그런 일은 반드시 기술자한테 자문하라고. 몇 달을 허비했어? 참 한심하다.”
해외 현장도 마찬가지였다. 정 회장은 “종합상사 해외지사는 뉴저지 지점과 샌프란시스코 지점 중 한 곳에서는 월요일 아침 6시, 다른 한 곳에서는 화요일 아침 6시에 나한테 꼭 전화하라고 일러달라. 리야드는 수요일 아침 6시에 전화 달라”(1985년 6월 3일)고 지시했다.
정 회장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현장의 사나이’로 통했다. 모두들 참 열심히 일했으나 그래도 내가 현장에 있을 때와 없을 때가 크게 달랐다. 현장 사람들 모두의 걸음걸이부터 달랐으니, 경영자가 직접 현장을 챙기고 안 챙기고의 차이는 대단히 큰 법이다… 원효로 4가에 있는 중기 공장은 매일 하루 한 번씩 가다가, 어떤 날은 하루 두 번도 갔다. 방심하고 있던 직원들을 혼이 빠지게 만들기도 했다.”
“주부들 입빠르다” 소비자 평판도 중시

1984년 10월 1일 사장단 회의에도 이런 그의 성향이 잘 드러난다.
“동서산업도 P.C(Precast Concrete) 콘크리트에 대해서는 지난번 현장에서 해 놓은 작업을 기준으로 보면 낙제다. 콘크리트의 품질도 그렇고, 강도도 그렇고 앞부분이 너무 두꺼워질 수밖에 없지 않아? 내가 보기엔 아직도 10년 전 방식을 그대로 쓰고 있던데, 과거 중동에서 하던 방식보다 발전된 형태로 구상해서 발전시켜야 한다.”
“현대전자 공장 (건설현장)에서 하는 걸 보면 딱 보여. 지난 주 일요일에 나가봤더니 예산 승인도 안 났는데, 공사를 하고 있길래 중단시켰다. ‘얼마에 하느냐’ 했더니 ‘삼천몇백만원입니다’라고 하더라. 100만원이면 될 일을 3000만원에 한다고? 당신네 밑에 있는 사무 라인에서 전부 현장 조사를 하면 그런 계획은 나올 수 없다. 어물쩍 넘기지 말라. 회사 이익보다 자기 실수나 장난이 드러날까봐 더 걱정하니까 발전이 없지.”
“반도체 공장도 똑같은 설계를 했는데 캘리포니아에서 만든 것과 우리나라에서 만든 건 완전히 천지 차이다. 국내 건설본부장이 질 향상에 관심이 없다는 얘기야. 책임자가 만족해버리니 현장 사람들도 더 나아지려 하지 않는다.”
그는 임원들도 ‘발품’을 팔아서 현재에 안주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책임자들이 아무리 바빠도 기계공업 전시장 등 모든 전시장에 전부 나가서 보라. 그걸 보고 바깥 세상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 무슨 전시든지 밑에 사람만 보낼 게 아니라 윗사람들이 나가보는 게 좋다. 그래야 감이 오는 게 있고, 설계를 할 때나 그 무엇을 할 때 남들보다 앞질러서 발전을 할 수가 있다.”(1984년 7월 9일 사장단 회의)
국내외 리셉션에도 웬만하면 참석하라고 했다. 정 회장은 “나는 리셉션이 아주 좋은 사교 장소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과 안면을 트고 인맥을 넓히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달라. 그게 영업이기도 하고 개인의 대인관계를 넓히는데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소비자 평판을 중시했다. 그 또한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1984년 10월 1일엔 이렇게 질책했다. “또 하나, 경종을 울려야 할 것은 한국도시개발(현대 그룹 계열사) 당신네가 짓는 주택이 현대건설보다 한참 떨어진다는 거야. 그렇지? 그런데 팔 때는 ‘현대 아파트’ 이름으로 팔고 있지? 그건 회사의 공신력을 떨어뜨리는 거다. 돈으로 따지면 몇 푼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로 인해 떨어지는 공신력은 엄청나다. 특히 주택은 소비자인 주부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지는 속도가 빨라. 불만이 생기면 걷잡을 수 없다. 각서를 받아서 품질을 확실히 보장하라.”
“하청업체 울리지 마라” 어음보다 ‘현금 지급’ 강조
정주영 회장은 “팔아주는 것이 큰 권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라며 “우리나라 기업 중 누가 먼저 그 생각을 버리느냐가 제일 진보된 기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84년 8월 27일 사장단 회의였다. 하청업체를 염두에 둔 발언이다. 그의 말이다.
“대부분 하청업자들은 모기업보다 비싼 이자를 물고 자금을 돌린다. 수형(어음)을 늦게 떼 주면 결국 하청업자를 망하게 하든가, 아니면 돈을 더 주고 비싸게 사게 된다고. 하청업자가 어쩔 수 없이 받아간다고 해서 3개월 이상 수형 떼 주는 걸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넘기는 회사가 있는데, 현금을 못 주고 한 달이든 몇 날이든 수형으로 줄 때는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돈이 없어서 못 주면서 수형을 끊어준 걸 더 당당하게 여기는 건 옳지 않다. 물건을 납품하면 현금을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회사에서 지급이 제일 늦은 회사가 어디야?”
계열사 상황을 보고받은 정 회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현대자동차와 인천제철은 90일이라는데, 이 사람들은 경영을 잘 못 하고 있는 거야. 자기 회사가 크다고 하청업체를 울리면 안 된다. 정부가 정책(2개월)을 시행하면 그대로 따라라. 인천제철도 반드시 두 달 안에 지급하고 될 수 있으면 한 달 안에 지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