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높은 가을, 내 가슴 속에는 오래도록 머물고 있는 작은 그리움 하나 자리하고 있다. 산이 바로 뒤에 있는 우리 집은 누가 산직이 집이라 이름을 붙여주지는 안 했지만, 자연스러운 산직이 집이었다. 아버지 살아계실 땐 하루아침도 거르지 않고 산을 돌아보고 오시던 모습 이 참 정성스러워 보였는데 아버님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는 그 일이 자연스럽게 우리 몫으로 넘겨졌다. 우리 내외는 그 정성의 반절도 안 되지만 아버님의 유지를 받들어 열심히 했다. 야트막한 산 오름은 부담스럽지 않아 좋았다. 조상님들의 묘를 둘러보며 부모님 묘 앞에서는 기쁘고 슬픈 사소한 얘기들까지도 작은 소리로 말씀드릴 수 있었다. 선산 밑에 살고 있는 나름의 작은 행복을 스스로 누리는 것이라 만족하며 살았었다.
선산으로 가는 길은 우리 집을 지나지 않고는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선산을 찾으려면 꼭 들러야 했다. 추석날 우리 집은 귀성객이 붐비는 대합실처럼 손님맞에 분주했다. 그 시절 식당은 지금 같지 않게 귀해서 객지에 사시는 분들의 대부분이 우리 집에서 점심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버님이 생전에 '손님을 잘 대접해 보내지 않으면 후회한다.'고 항상 이르신 가르침에 꼭 식사를 우리 집에서 하고 가시도록 했다. 특히 추석에는 멀리 사는 조카들 그리고 자녀들 까지 삼대가 넓은 마당에 가득하여 금세 축구장도 되고 잔디밭은 씨름판도 된다. 그렇게 모이다 보면 삼십 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산소를 다녀오는 동안 식사 준비가 미처 안 되었을 때는 내가 총지배인이 되어 손님들까지 합세해 안 쓰던 그릇까지 총동원되었다. 웃음꽃 까지 곁들여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도깨비시장 같고 거실은 물론 방마다 식당 같은 분위기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움에 얘기 꽃을 피우고 얽히고설킨 핏줄은 하나가 되어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듯 진한 가족의 뜨거운 핏줄이 온몸을 타고 도는 듯 했다. 어떻게라도 식사를 해서 보내야 마음도 편안했던 시절이었다. 식사 후식으로는 집안 과일나무의 과일들을 대접하고 나면 여자들은 모두 주방에 들어가 설겆이를 하면서 그동안 못다 한 얘기들로 접시 가 뒤집어졌다. 피붙이 들이 함께 어우러져 서로를 보듬어 안는 진한 가족애로 무르 익었다.
이날이 지나면 언제 또 이렇게 동기간들이 모여 정을 나눌 수 있을까?
그듵이 떠나면 정거장 대합실처럼 붐비던 우리 집은 쓸쓸한 시골 간이역처럼 조용하다. 해마다 명절이면 온 집안에 가득하게 모여 정을 나누며 헤어짐이 아쉬워 손을 부여잡으며 작별을 서러워하던 따뜻한 손들이 그립다.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 그릇을 치우며 깔깔거리던 여인들의 모습이 그 웃음소리와 함께 주방 안에서 맴돌고 있다. 언제 다시 그런 날들이 오려는지 그리움들을 가슴 한쪽에 곱게 묻어 두고 영원한 그리움인 것 같아 오늘도 나 혼자 산에 올라 신석정 당숙님의 유택 앞에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리고 시비에 새겨진 '소년을 위한 목가'를 낭송해 보고 그 붐비던 옛날을 생각하며 터벅터벅 내려온다.
당질부 김호심은 당숙인 석정 선생님 시구가 너무 좋아 부안문화원에서 시 낭송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노인들 시 낭송 동아리 ‘풍경소리’ 시 낭송 강좌에는 ‘부안모네 발달 장애인 주간 보호활동 센터’에서 온 장애인들도 참여한다.
△ 김호심 수필가는 신석정 시인의 당질부다. <한국문인>으로 등단했으며 행촌수필 이사, 석정문학관 운영위원, 부안문화원 시낭송 지도 강사이며 부안 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부안향토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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