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로맨틱한게 아니야’ 조력자 되기를 가르치는 사회

2024-10-16

2019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낙태죄’는 폐지됐지만 4년이 넘도록 정부와 국회는 임신중지 시스템을 어떻게 보건의료 시스템으로 들여놓을지 논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7월 초 임신 36주째에 ‘낙태 수술’을 했다는 유튜브 영상이 논란이 되자 보건복지부는 며칠 만에 살인죄 혐의로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죠. 이렇게 정부가 빨리 대처할 수 있는데 임신중지 시스템에 대한 고민은 왜 더뎠을까요.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은 그간 정부와 국회가 무엇을 해야했는지 ‘낙태죄 폐지 이후 상상력’을 보여주기 위해 윤정원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전문의의 ‘스웨덴 연수기’를 연재합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의 연구위원인 윤 전문의는 지난해 12월부터 두 달간 스웨덴 연수를 다녀왔는데요. 스웨덴은 80년 전부터 포괄적 성교육을 도입했고 재생산 건강을 인권의 영역에서 다루고 있는 국가입니다. 그는 임신중지가 필수 의료인 스웨덴의 제도, 클리닉 운영 사례 등을 플랫 사이트에 5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플랫의 3번째 입주자 프로젝트인 ‘윤정원의 스웨덴 연수기’는 플랫 홈페이지와 셰어 홈페이지에 동시에 실립니다.

5회는 스웨덴 청소년의 성 건강을 위한 의료와 상담을 제공하는 유스클리닉 탐방기를 싣습니다.

📌[낙태죄폐지, 다음을 상상하다①] 모든 아이들이 원하는 때, 환영받으며 태어나기 위해

📌[낙태죄폐지, 다음을 상상하다②] “임신중지를 잘 받아야 정말 임신하고 싶을 때 잘 할 수 있다고 너네 정부에 이야기해봐”

📌[낙태죄폐지, 다음을 상상하다③]“원치 않은 임신중지를 줄이는 것이 목표지, 임신중지를 못 하게 해서 출산을 늘린다고요?”

📌[낙태죄폐지, 다음을 상상하다④]‘종교적 신념’ 주장에도…“조산사는 임신중지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스웨덴의 결론

스웨덴의 유스클리닉은 스웨덴 청소년의 성 건강을 위한 의료와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간호사와 전문상담사, 조산사, 의사 등 의료진이 상주해 성 건강과 관련된 진단과 상담을 하고, 경증 질병 치료를 하며 다른 의료기관과 연계될 수 있도록 돕는다.

1970년 스웨덴 달라나 지역의 소아과 의사 구스타프 회그베리(Gustaf Högberg)가 첫 유스클리닉을 개원했다. 현재는 전국에 265개의 유스클리닉이 운영중이며 수도인 스톡홀름에만 31개가 있다. 유스클리닉은 각 지자체의 지리적 특성, 청소년 인구 비중, 이주인구 비중 등 운영 주체에 따라 특색있게 운영되지만 ‘전국유스클리닉연합회’와 ‘종사자 지침’을 가지고 있어 전국적으로 동일한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곳은 만 12세(성조숙증 등의 상담이 필요한 경우 더 어린 연령의 진료도 가능하다)에서 23세 이하는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개원 당시, 학교 보건의 연장선에서 학교 간호사를 보완하는 성 자문 기관이었던 유스클리닉은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의료기관으로서의 기능이 계속 커졌다. 이는 1차 의료의(주치의)가 맡기 어려운 영역이 분리되어 특화한 것이다. 스웨덴의 모든 국민에게는 1차 의료의(주치의)가 지정되어 있는데 이들은 보통 지역에서 한 번 지정되면 가족 구성원 전체를 평생에 걸쳐 관리하게 된다. 때문에 주치의에게 성에 관련된 상담이나 진료 받기를 꺼리는 경우도 있다.

심리적 우울이나 불안도 유스클리닉을 찾는 이유가 된다. 자살 징후,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심각한 학대 상태를 제외하고는 유스클리닉 방문자들의 정보나 상담 내용은 철저한 비밀보장을 원칙으로 한다. 유스클리닉은 구체적인 피임법 상담과 임신테스트, 성병 검사, 성폭행 사후 조치, 임신중지 연계 등에도 관여한다. 방문자들은 간단한 산부인과·비뇨기과 진료를 통해 진단과 처방을 받을 수 있으며 센터에서 처방되는 약제(피임약, 진통제, 성매개감염에 대한 항생제)는 무료다. 성과 관련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의료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유스 클리닉

2023년 12월 19일에 방문한 순비베리 유스클리닉은 인구 3000명의 스톡홀름 내 자치구를 맡고 있다. 유스클리닉 필수 인력인 상주 조산사, 상담사(사회복지사 자격증 또는 임상심리자격증 소지자가 할 수 있다) 이외에도 파트타임 산부인과 의사, 파트타임 영양상담사, 파트타임 물리치료사가 함께 일하고 있다. 파트타임 산부인과 의사는 카롤린스카 병원 소속으로 주 1회, 오전 시간에 유스클리닉에 와서 진료를 본다. 주로 조산사가 다낭성난소증후군, 자궁내막증 등 진료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청소년들의 예약을 잡으면 의사들이 질환을 진료한다.

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순비베리 유스클리닉은 25년 전 솔나 지역이 따로 독립하며 순비베리 지역구만 관할하게 되었다. 이곳은 역사가 오래된 만큼 지역사회 이해도가 높은데, 스튜어트 조렌(Stuart Jouren) 이라는 지역사회의 성 상담 비정부기구(NGO)와 20년 이상 협업해 오기도 했다. 스튜어트 조렌은 채팅과 전화상담 위주의 상담을 하는데 상담을 받는 사람에게 의료적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순비베리 유스클리닉을 안내한다. 또한 주정부에서 시행하는 스프린트 그룹이라는 이주민 정착 프로그램에도 성교육과 유스클리닉 소개시간이 한 시간씩 포함되어 있어 방문교육을 하기도 한다.

공공의료시스템을 가진 스웨덴은 한 지자체 내의 모든 의료기관이 동일한 공공의료 서버를 사용한다. 진료이력은 모든 의료기관에 공유되며, 본인의 의료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유스 클리닉의 진료 기록은 다른 어떤 기관에서도 열람할 수 없다. ‘부모가 자녀의 진료 내용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접근하려는 경우’ 어떻게 하는지 질문 한 적이 있는데 그 대답이 신기했다.

“1970년대에 처음 이 제도가 도입되었을 때는 부모가 진료실에 동행하길 요구한다거나, 나중에 진료기록을 알려달라고 소란을 피우는 일들도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지금은 한 세대가 지났어요. 우리 클리닉을 방문하는 청소년들의 부모는 본인이 유스클리닉을 이용하고 경험해 본 세대거든요. 비밀이 보장되어 믿을 수 있는 이 시스템에 대한 경험과, 우리 사회가 아동·청소년의 복리를 최우선시 한다는 신뢰가 축적되어서 이제는 그런 일들이 없어요. 이민자 커뮤니티에서는 아직도 부모가 자식을 소유한다는 개념이 있어서 유스클리닉에 전화를 하거나 찾아오는 일들도 있지만, 결국엔 센터와 국가 정책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청소년 중심의 진료를 계속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단, 유스클리닉은 청소년들이 폭력이나 자해, 타인에 의한 위해 상황에 직면했을 때에는 학교나 보호자, 청소년보호기관에 신고할 의무를 지닌다.

순비베리 유스클리닉에는 에밀, 크리스틴, 테레스 세 명의 상담사가 있다. 이 중 두 명은 상주하고, 한 명은 지역의 학교나 유스센터 등 청소년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활동한다. 학교에도 상담사가 있지만 유스클리닉에서는 성과 성 정체성에 대한 좀 더 전문적인 상담이 가능하다. 상담 세션은 45분까지 무료며 상담사가 추가 상담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3회차까지 추가 상담이 가능하다. 필요한 경우 정신과 진료나 지역사회의 심리상담사에게 상담을 의뢰하거나 커플상담이나 부모교육을 같이 하는 경우도 있다.

유스클리닉에 방문하기 어렵다면 1177, UMO

2024년 1월 22일에는 솔나 유스클리닉을 방문해 산부인과 의사 잉그리드 사브(Ingrid Saav)의 진료를 참관하고 대화를 나눴다. 잉그리드는 일주일에 반나절은 솔나 유스클리닉에서, 반나절은 순비베리 유스클리닉에서 진료를 한다. 그는 카롤린스카 의과대학의 교수, 국립보건복지위원회의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잉그리드는 유스클리닉이 센터마다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반의가 상주한 기관도 있고, 성매개감염 전문가가 파트타임으로 근무하고 있는 기관도 있어 상담이 필요한 경우 서로 의뢰를 하기도 한다고 했다. 모든 의료기관이 공동서버를 사용하다보니, 의료진들 사이에서 의뢰와 회송, 상의는 메일 한 번으로 쉽게 할 수 있다.

유스클리닉의 예약은 공공의료시스템 내의 진료예약시스템인 1177(https://www.1177.se/)를 이용한다. 1177은 응급환자 분류체계(Triage) 교육을 받은 조산사나 간호사가 전화로 간단한 상담을 진행하고 진료예약을 잡아주는 시스템으로 전화상담과 인터넷 상담을 제공한다. 1177을 이용할 경우 상담사들이 기본적인 문진 후 이를 공공의료 서버에 업데이트 하기에 의료기관에 내원해 다시 초진을 받을 필요가 없다. 상담사는 조산사 진료가 필요할지 산부인과나 성매개감염 전문가 진료가 필요한지를 판단해 진료예약을 잡는다. 유스클리닉은 12~13세 환자의 경우, 성교육이 필요하고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조산사가 먼저 자료를 안내해주고 의사 예약을 잡도록 하고 있다. 물론 조산사 진료 후 조산사의 판단에 따라 산부인과 의사가 다시 진료를 보기도 한다.

클리닉을 찾기 어렵거나, 상담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 전국에서 동일한 수준의 질과 정보를 제공하고 온라인으로 상담을 할 수 있는 홈페이지가 있다. UMO(https://UMO.se Ungdomsmottagning, Youth Guidance center)는 성, 건강, 가족 관계, 약물 등의 다양한 이슈를 다루는 종합 사이트로, 전국의 모든 지자체에서 세금의 일부를 지원해 운영하는 홈페이지다. 유스클리닉에서 사용되는 많은 교육 자료와 팸플릿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제작되었고, 상담사들이 돌아가면서 이곳에 기고하기도 한다.

스웨덴에는 다양한 의제별 비정부기구(NGO)와 캠페인이 있다. 성과 재생산권리 단체인 RFSU와, LQBTQ 단체인 RFSL 등이 유명하며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한 풀뿌리 단체들도 유스클리닉과 긴밀하게 협력해 촘촘히 청소년들을 지원한다.

질투는 로맨틱한게 아니야

그 중 현재 한국사회에 의미 있을 캠페인을 하나 소개하고 싶다. ‘질투는 로맨틱한게 아니야’라는 캠페인이다.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을 청소년기부터 사전 예방하는 콘텐츠로 흔히 로맨틱하다고 오해하기 쉬운 질투가 통제와 폭력과 연결될 때, ‘그건 낭만적인게 아니’라는 메시지를 청소년에게 다양한 사례와 영상들로 전달하고, 지원이 필요한 상황일 때 조언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인상적인 페이지는 ‘친구가 연애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라는 페이지인데, 당사자가 아니라도 폭력을 목격했을 때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친구에게 (선을 넘지 않고, 영웅 심리를 누르면서)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지 알려주는 정보들을 담고 있다. 구글 번역이 잘 되니 꼭 보시길! 피해자가 됐을 때 어떻게 할지, 가해자가 되지 않는 교육만 들어온 한국인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이었다. 이 사회의 동료 시민들이 방관자가 아니라 조력자가 되기를, 2차 가해가 아니라 사전 예방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니,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도 학습될 수 있는 거였다.

📌질투는 로맨틱한게 아니야 캠페인 (https://www.svartsjukaarinteromantiskt.se/en)

포괄적 성교육은 커녕 아직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당하면 발을 밞거나 가방을 고쳐 맨다’ 라는 교육부 성교육 표준안으로 교육을 하는 나라, 다양한 책들을 몰아내고 금지와 차별만 경험하게 하는 환경 속에서 점점 연애와 성관계의 연령은 낮아지고 있고, 동시에 성폭력도 어려지고 다양한 얼굴을 띄고 있다. 제대로 된 성교육이 필요하다는 위기의식을 가진 일부 학부모들은 사설 성교육 시장에 눈을 돌리지만, 고가의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정보력과 자금은 모두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불건강한 관계에 더 취약한 계층이, 건강을 지킬 자원과 정보에의 접근성까지 낮아지는 아이러니에 빠진다.

적어도 우리가 아이들 기본 교육은, 밥 한 끼는, 의료는 모두가 차별 없이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마음을 모았다면, 내 몸과 관계 맺고 타인과 관계 맺는 기본적인 기술들도 보편적으로 알아야 한다고 마음을 모을 수 있지 않을까. 무료 콘돔을 종류별로 한 움큼씩 집어 들었다가, 이렇게 사람들이 다 가져가면 재정이 너무 많이 들 텐데, 쥐 고양이 생각을 했다가, 어딜 가도 콘돔을 구할 수 있으니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는 방문자들을 보면서, 나는 한없이 부럽고 부끄러워졌다.

▼ 윤정원 국립중앙의료원 전문의 erynies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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