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대법원이 기존 판례를 뒤집고 내린 “근로자의 재직 여부나 근무 일수에 따라 조건부로 지급되는 정기 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판례의 후폭풍이 거세다. 중앙일보가 취재한 대기업 인사팀들은 "손도 못 대고 있는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
“상여금이 연봉의 10% 수준으로 상당히 높은데, 통상임금에 산입되면서 고정시간외근로수당(OT), 실제OT, PI와 PS 같은 성과급, 개인연금, 연차휴가수당 등 연동된 금액이 일제히 올라 몇백억 수준을 지급하게 생겼다. 소송도 걸려있어 소급도 해줘야 하고, 소송을 안 한 계열사조차 '우리도 달라'고 한다. 해결책이 안 보인다." (금융권 A사 인사팀장)
“당장 2024년 연차수당과 퇴직금 등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크다. 이달 월급일부터 적용돼, 안 주면 임금체불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 그런데 12월 19일 이후 ‘발생된’ 연차에 주는지, 12월 19일 이후부터 ‘지급되는’ 연차수당만 주면 되는지 로펌도 의견이 달라 결정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대기업 B사 인사팀)
결론부터 얘기하면 A사의 우려와 B사의 궁금증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은 아직 없다. 통상임금을 대폭 늘리는 '핵폭탄급' 판례가 유예기간도 없이 떨어진 탓이다. 이광선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한 기업은 근로자 수가 많다 보니 이번 판결로 600억원 가량의 추가 부담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답답한 기업들은 고용노동부 '통상임금 노사지도 지침'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기업의 민원이 많은 만큼 속도를 내고 있어 이달 중에 지침이 나올 전망이다. 하지만 고용노동부 측 관계자는 "지침에 모든 케이스를 담지는 못할 것 같다"며 "차후 부족한 부분들은 질의를 받아 답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현장의 혼란은 단시간에 해결되기는 힘들 전망이다.
최근 한 달 새 열린 김앤장·세종·율촌·태평양·광장·바른 등 국내 대형 법무법인 통상임금 세미나에서도 인사팀의 질문과 우려가 쏟아졌다. 지난 5일 온라인으로 통상임금 세미나를 연 율촌 측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가장 참석자가 많은 세미나였다"며 "3000명이 신청했는데 2500여명이 동시 접속을 했다"고 전했다. 태평양과 광장도 각각 "세미나 이후에도 자료 요청이 빗발쳤다" "신청자 참석률이 90%가 넘었고 평소 질의가 많이 없는데 사전질의부터 쏟아졌다" 등 분위기를 전했다. 그 만큼 현장의 혼란이 크다는 방증이다.
기업 입장에서 가장 큰 우려는 ①지급주기가 긴 명절상여금이나 경영성과급 등 다른 항목도 차후 통상임금에 들어가 비용 부담이 늘지 ②당장 통상임금으로 갑자기 늘어난 부담을 어떻게 줄여 나갈 지다.
이번 판례가 '근로의 대가=임금'을 강조한 만큼 앞으로 각종 수당들에 대한 소송이 잇따를 수 있다. 김상민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통상임금 적용에서 배제되는 다른 조건이 붙던 수당들도 향후 소송의 여지는 없는지 우려가 많고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추가로 어떤 임금이 통상임금에 들어갈지는 기업마다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소송 결과를 봐야 한다. 지급주기가 긴 명절상여금이 대표적인 예다. 다만, 성과나 실적과 연동되는 성과급은 통상임금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로펌들의 공통된 판단이다.
지난달 19일 판례로 늘어난 임금 부담은 근로자나 노조와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할 부분이다. 김영진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기업 입장에서는 상여금의 통상임금 편입으로 총 지급 임금이 올해 갑자기 늘어난 만큼 올해 임금협상부터 당장 고민일 것"이라며 "연장근로를 줄여 인건비를 감축하거나 통상임금에서 제외되는 성과 연동 임금 비율을 올리는 방식 등의 협상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역시 쉽지 않다. 기업은 임금체계 개편으로 부담을 줄이고 싶지만, 노조 측에서는 늘어난 통상임금을 토대로 올해도 임금협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 차이가 커서다. 이미 일부 노조는 “고정성 임금을 성과나 실적에 연동하는 임금으로 변경하려 시도하면 강경하게 저지한다”는 지침을 내려보낸 상황이다.
실제로 한 대기업 인사팀 관계자는 "결국 통상임금이 늘어나면서 연장·야간 근로를 축소하거나 연차 사용을 늘려서 인건비 부담을 줄여야 하는데, 노동조합이 동의해주지 않으면 쉽게 바꿀 수 없다"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문제는 올해도 기업 현장에 영향을 줄 노동 관련 판례들이 줄줄이 대기중이라는 점이다. 삼성전자·LG디스플레이 등 대기업의 ‘경영성과급을 퇴직금(평균임금)에 반영해야 하는지’를 쟁점으로 한 임금소송 판결이 대표적이다. 또, 원청기업이 협력업체(하청) 노조와 단체교섭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지를 쟁점으로 하는 HD현대중공업 ‘부당노동행위’ 사건도 대법 전원합의체에 회부돼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판례가 부당노동행위를 인정한다면 사실상 '노란봉투법' 일부 입법 효과를 내는 영향력이 큰 판례다.
이정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임금 관련 사항은 노사현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만큼 대법원 판례에 맡겨둘 게 아니라 국회나 정부가 입법을 통해 명확히 규정해야 현장에서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