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탄생
차병직 지음
바다출판사
헌법은 특히 난세에 관심을 모은다. 변호사인 지은이는 헌법을 근대국가의 징표로서 ‘너와 나 모두가 주권자’라는 국민주권의 가치를 담은 보증서라고 말한다. 대의제와 권력기관 배치, 권력 제한 등의 규정은 헌법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장치다. 헌법 제정을 통한 주권혁명과 근대 입헌국가로의 이행이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책의 부제처럼 ‘피와 저항으로 쓰인 헌법의 세계사’였다.
지은이는 근대 헌법들을 두루 살핀 결과, 국민주권과 궤를 함께했다는 보편성은 있지만 제정 배경과 과정은 지역적이라고 강조한다. 영국은 의회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운영하며 시스템을 확립한 역사 자체가 헌법이다. 미국‧프랑스 등에선 혁명으로 구제도를 타파하는 과정에서, 독일은 19세기 통일운동 과정에서 각각 헌법을 제정하거나 입헌운동을 펼쳤다.
일본은 19세기 첫 헌법인 메이지헌법에서 천황주권을 명시했지만, 미군 점령기에 국민주권으로 국체를 변경한 신헌법으로 바꿨다. 청나라에선 청일전쟁 패배 뒤 통렬한 반성과 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입헌운동이 나타났다. 신중국에선 사회주의적 개조를 위해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했다.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식민지 독립운동에서 헌법쟁취는 독립의 수단이자 목표였다. 이슬람세계에서도 이슬람법(샤리아) 아래 인간을 다스리는 헌법을 제정했다. 책에 부록으로 실은 ‘52개국 헌법 제1조’는 헌법의 보편성과 지역성을 요약한다.
국민주권의 거대한 흐름은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 주권이 군주 소유였던 조선 또는 대한제국이 무너지며 시작된 한반도 독립운동은 국민주권의 입헌 건국이 목표였다. 3‧1운동 직후 등장한 조선민국 임시정부 창립장정, 대한민국 임시헌장, 신한민국정부안, 고려임시정부안 등은 한결같이 대의제와 국민 자유‧권리를 앞세운 민주공화제를 내세웠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유품에서도 국민주권을 명시한 ‘대동단결 선언’이 발견됐다.
해방 뒤인 1948년 7월 7일 38선 이남에선 대한민국 헌법이, 이북에선 9월 8일 조선민주주의공화국 헌법이 제정됐다. 지은이는 분할된 남북 헌법을 주권혁명이라는 거대한 물결의 문턱에서 겪어야 했던 ‘고난과 희망의 운명에 대한 첫 번째 요약’이라고 평했다.
책 도입부에 1940년 나치를 피해 미국에 도착한 오스트리아 수학자 쿠르트 괴델이 시민권 심사를 위해 헌법을 공부하다 미국도 독재국가로 바뀔 수 있는 논리적 결함을 발견했다는 일화가 소개된다. 동일 규정을 해석하더라도 적용하는 논리 방식에 따라 정반대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지은이는 성숙한 헌법적 관행은 헌법 규정의 자구만 따져서는 형성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바람직한 헌법적 관행이 현실 정치 행위를 통해 거듭 확인되고 다져져야 최고의 헌법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울림을 준다. 헌법 준수 의무자는 국가이지만, 수호자는 국민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