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중학교 3학년이었던 김미숙씨(57)는 경북 구미의 한 섬유공장에 취업했다. 생애 첫 사회생활이었다. 앳된 미숙씨에게 사장이 말했다. “경리가 월급 계산을 틀릴 수도 있으니까 잔업이 있을 땐 꼬박꼬박 기록해서 말하세요. 자기 것을 못 찾는 건 바보짓이에요.” 고개를 끄덕인 미숙씨는 생각했다. ‘아, 나에겐 내 것을 당당하게 요구할 권리가 있구나.’ 미숙씨는 사장의 말에 따라 월급 계산이 틀릴 때마다 찾아가 일한 만큼 돈을 받았다. “뭐든지 내가 알아서 찾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숙씨는 그때 깨달았다.
2018년 12월27일,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소위가 열린 서울 여의도 국회 복도에서 미숙씨가 다급하게 마이크를 붙잡았다. 회의실 안에선 몇 주 전 숨진 아들 용균이의 이름을 딴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 논의가 한창이었다. 미숙씨가 벽 너머 의원들을 향해 외쳤다. “얼마나 더 죽어야 법을 바꿀 겁니까!” 몇 시간 뒤 회의실 안에서 법안의 통과를 알리는 의사봉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숙씨가 나서서 찾은 권리가 세상의 노동자들에게로 번졌다.

충북 영동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미숙씨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삶”을 꿈꿨다. “돈벌이 그런 거 말고 그저 착하고 잘 맞는 사람”이면 충분했던 미숙씨는 스물한 살에 섬유 공장에서 남편을 만났다. 아들 용균이를 낳은 부부는 외환위기로 공장이 문을 닫자 경북 영천에서 고추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어리고 순한 용균이는 강아지들이 밥그릇에 발을 집어넣으며 허겁지겁 사료를 먹는 모습을 보고 까르르 웃곤 했다. 용균이네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리자 남편이 “발에 제기가 달린 듯이” 제기를 차고 돌아와 온 가족이 왁자하게 웃어대기도 했다. 소박하고 단출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미숙씨가 그렸던 꿈처럼 그저 재밌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용균이가 중학생이 되고 찾아온 명절날이었다. “가슴이 답답하다”던 남편이 쓰러졌다. 병원에선 남편이 깨어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미숙씨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남편을 지켰다. 이틀만에 깨어난 남편은 “나를 알아보겠냐”는 미숙씨의 물음에 “내가 널 못 알아보면 누굴 알아보냐”며 씨익 웃었다. 남편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후유증이 심해 더 일할 수 없었다. 가장이 된 미숙씨는 구미의 공장에 취업했다. 집에선 젖병에 분유를 타 남편을 먹이며 간호했다. 미숙씨는 7년간 회로기판(PCB) 불량 여부를 검사했다. 눈썰미가 좋고 꼼꼼해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용균이도 취업했고 남편의 건강 상태도 차차 나아졌다. 생활이 점차 안정되던 어느 날 새벽이었다. 미숙씨의 전화가 울렸다. 경찰서에서 용균이가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부부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에 있을 줄 알았던 용균이가 영안실에 있었다.

한국서부발전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용균씨(당시 24세)는 2018년 12월11일 새벽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떨어진 석탄을 치우려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숨졌다. 야간에는 2인 1조로 일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회사는 ‘인력 수급’을 이유로 1명만 배치했다. 혼자서 일하던 용균씨는 사고 후 4시간 만에 발견됐다. 용균씨가 발견된 후에도 회사는 옆에서 기계를 가동했다. 하청회사 이사는 미숙씨에게 다가와 “용균이가 가지 말라는 곳을 갔고 하지 말라는 일을 하다 사고가 났다”고 설명했다. 그 말을 믿을 수 없던 미숙씨는 용균이가 일하던 발전소를 찾았다. 사고 현장은 이미 물청소가 돼 있었다. ‘우리 애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야만 한다.’ 미숙씨는 용균이의 장례를 미루고 싸움을 시작했다.
“말주변도 없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던 미숙씨의 얼굴이 신문에 실리고 목소리가 방송에 보도됐다. 미숙씨는 위험한 작업의 도급을 금지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통과될 때까지 용균의 빈소와 국회를 오갔다. 어렵사리 통과된 법안엔 용균이가 일했던 화력발전소 등은 제외됐다.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회사가 아닌 국가”라는 걸 깨달은 미숙씨는 사업주를 처벌할 수 있는 법을 만들고자 했다. “노동자의 목숨값이 싸서” 반복되는 산업재해를 막으려면 결정권을 가진 “윗사람”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전 의무를 다하지 않은 원청을 처벌하는 중대재해처벌법이 통과되기까지 미숙씨는 말하고 굶고 외치고 행진했다. 4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미숙씨에게 ‘제2의 이소선’이란 호칭이 붙었다.

미숙씨가 만든 법들은 용균이의 사건엔 적용되지 않았다. 원청인 한국서부발전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주변 사람들이 물었다. “용균이는 이미 죽었는데 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싸우느냐”고. 미숙씨에겐 세상의 모든 노동자가 용균이었다. 그래서 모조리 살리고 싶었다. 미숙씨가 말했다.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들의 혼이 다 내 몸으로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용균이의 혼만 내 안에 있으면 ‘이제 됐다’고 물러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러지 않도록 그 많은 원한과 혼들이 내 몸 안에 들어와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에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노동조합은 불량한 줄만 알았고 산재가 일어나도 ‘또 누가 죽었구나’라고만 생각하던” 미숙씨가 어느새 노동 운동가가 돼 있었다.
미숙씨는 용균이가 초등학생이었던 어느 가을을 기억한다. 학교를 마친 용균이가 조그만 봉지에 노란 은행을 한가득 담아왔다. 엄마가 은행을 좋아한다는 걸 기억한 용균이가 바닥에 떨어진 작은 은행들을 알알이 모아왔다. “그 냄새나는 걸 그 조그만 애가 주워온 거예요. ‘뭐하러 갖고 왔냐’고 물었더니 용균이가 ‘엄마가 좋아할 것 같아서’하고 웃었어요.” 엄마에겐 좋은 것만 가져다주던 용균이는 떠나면서는 세상을 가져다줬다. “용균이를 잃지 않았으면 세상을 잘 몰랐을 것 같아요. 비정규직이 뭔지도 잘 몰랐으니까요. 옛날엔 정의가 저절로 생기고 힘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달라요. 정의는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거예요.” 용균이의 혼을 가슴에 품은 미숙씨가 바꾼 세상에서 오늘도 수많은 ‘김용균들’이 살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