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벽돌공장에서 한국인이 이주노동자 동료를 지게차에 매달았다는 뉴스에 놀란 건 대통령만이 아니다. 나도 놀랐다. 작년 겨울에 계엄령을 들었을 때처럼 우리 공동체의 이야기가 아닌 줄 알았다. ‘방탄소년단’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 우리 K문화가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우리 공동체에서 벌어진 일이 아닌 줄 알았다.
한국인 동료가 감히 이주노동자를 지게차에 매달 수 있는 용기는 GDP(국내총생산)에서 나왔다. ‘우리’나라의 소득이 높은 한국인 노동자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노동자에게 가혹행위 정도는 ‘장난’으로 할 수 있다. 영상을 보면 지게차에 이주노동자를 매달 동료는 “잘못했어? 잘못했다고 해야지”하며 훈계하는데, 이런 건방짐도 소득의 자신감에서 나왔다. 피부색, 언어,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폭력과 차별 속에서 이주노동자는 ‘우리’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약한 이웃에 고통 주고도 태연
연대·돌봄 가치 흔들리는 시대
성공의 방정식은 소수에만 허락
‘관계와 성숙’으로 공동체 지켜야

어찌 이주노동자에게만 그럴까. 누구한테 배웠는지 아이들이 임대 아파트에 사는 이들을 ‘거지’ 또는 ‘벌레’로 부르는 우리네 모습이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 줍니다”는 말이 떠도는 사회에서 ‘나’는 아파트 가격으로 설명된다. 동네에 장애인 학교 설립을 바라는 장애아 부모들의 무릎을 꿇리며 ‘집값 하락’을 말하는 이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성경에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하지만, 누구에게는 집값 떨어지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결국 약자들이 우리 공동체에서 ‘함께 살기’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는 지게차에 매달리거나 무릎 꿇고 빌어야 한다.
사람을 돈으로 평가하고 약자를 이웃으로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결국 “억울하면 출세하라”거나 “모두 부자 되세요”의 말을 따라야 하는가. 그래서 국회의원도 국회에서 코인과 주식을 하는 것인가. 국민에 대한 봉사를 마음에 새겨야 하는 정치인이 선도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인가. 결국 선하신 하느님을 바라본다는 영혼마저 끌어다 투자의 제단에 바치는 ‘영끌’이 답인가.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되는 것이 네가 가야 할 길이라고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면 되냐 말이다.
하지만 우리 공동체에 흔히 알려진 출세·성공의 방식을 따라가도 성공의 젖과 꿀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락된다. 사람들은 공대가 아닌 의대에 학생들이 몰려서 나라가 큰일이라고 말하지만, 그보다 ‘스카이서성한중경외’가 출세를 가져올 마법의 주문이라며 학생들이 줄줄 외우고 있는 현실이 더 끔찍하다. 서울대를 10개 만들어도 학생들은 ‘스카이×10서성한중경외’를 부르며 학원에 갈 것이다. 저 SKY에서 내려오는 ‘성공’이라는 은총은 받는 선택받은 자가 되기 위해 학생들은 입시의 트랙을 뛰어가는 경주마가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스카이서성한중경외’가 나의 ‘노오오오력’이 아니라 부모의 인맥과 학력으로 결정된다면 더 큰 일이다. 많은 사람이 말하듯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는 끝났다. 과거에는 전쟁으로 인해 사회 곳곳에 빈자리가 많았고 경제도 성장함에 따라 일자리가 늘어났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자리는 채워졌고 경제 불황과 인공지능 같은 기술의 발전으로 그나마 있던 자리도 사라지고 있다. 이렇듯 사회가 축소되는 시기에, 엄청난 사교육비를 낼 수 있는 재력과 자녀 원서에 경력을 채워 줄 수 있는 부모의 인맥이 출세의 마스터키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을 서민의 자녀들이 따라잡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 공동체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성장과 번영으로 이끌어 왔던 일명 ‘성공의 방정식’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냉철한 마음으로 한계를 인정하고 ‘성장과 번영’이라는 목표가 아니라 ‘관계와 성숙’을 목표로 우리 공동체의 윤리와 개인의 도덕성을 다시 재무장할 필요가 있다.
프란치스코 전임 교황은 회칙 ‘모든 형제들’에서 “모든 것이 와해되고 일관성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에 ‘연대’에 호소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 연대는 우리가 공동의 미래를 건설하고자 노력할 때에 다른 이들의 나약함에 대한 우리의 책임감에서 생겨납니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 미네소타주의 한 가톨릭 학교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 후 사람들은 “우리는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결국 우리 사회를 지탱해 내는 건 높은 곳을 향하는 서로 간의 아귀다툼이 아니라 모두를 ‘이웃’으로 환대하는 우리의 마음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말씀이 우리의 희망이다. 그렇게 되길 빈다.
조승현 가톨릭평화방송 신문(cpbc) 보도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