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뻔뻔함이 ‘뉴노멀’인 시대의 초상

2025-12-26

연말은 내게 정산의 계절이다. 이맘때면 습관처럼 한 해 동안 접했던 다양한 콘텐트를 돌아보고 경향을 파악한다. 세상 흐름과 동떨어지지 않으려는 나름의 노력이다. 내 눈에 가장 뚜렷한 경향성을 보인 콘텐트는 드라마였다. 올해는 유독 사이코패스 캐릭터를 다룬 드라마가 많았다. 디즈니플러스 ‘나인 퍼즐’ ‘매스를 든 사냥꾼’ ‘조각도시’ ‘하이퍼나이프’, 넷플릭스 ‘다 이루어질 지니’ ‘자백의 대가’, 티빙 ‘친애하는 X’, 웨이브 ‘단죄’, SBS ‘모범택시 3’ ‘사마귀 : 살인자의 외출’ 등 당장 떠오르는 작품만 헤아려도 두 자릿수다.

조진웅과 박나래 사건을 둘러싼

세간의 반응은 이해하기 힘들어

편가르기가 생존전략으로 보여

진영 논리에 기준 흔들려선 안돼

결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에 관한 분석을 찾아봤지만, 설득력 있는 건 드물었다. OTT의 드라마 제작 환경이 지상파 방송사보다 자유롭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그나마 눈에 띄었다. 그뿐일까. 질문하면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아 멀리했던 챗GPT를 오랜만에 찾았다. 챗GPT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집단적 불안’을 이유로 꼽으며 “저 인간은 왜 저럴까라는 질문을 가장 직접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캐릭터가 사이코패스”라고 분석했다. “올해는 인간을 믿기 어려운 해”였다는 한 줄 정리와 함께.

챗GPT의 분석을 보고 최근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개그우먼 박나래씨의 매니저 갑질과 불법 의료 행위 의혹 논란, 배우 조진웅씨의 강도강간 소년범 전력 논란을 떠올렸다. 윤석열 전 대통령 비상계엄 재판, 김남국 전 대통령실 디지털소통비서관의 인사 청탁 논란 등 굵직한 이슈들을 한동안 묻어버릴 정도로 파장이 컸다. 정확한 사실관계가 아직 가려지진 않았으므로 두 사건의 옮고 그름을 따지진 않겠다. 다만 두 사건을 둘러싼 세간의 반응이 기괴해 이를 짚고 넘어가려 한다.

박씨 관련 논란이 처음 불거졌을 때, 여성 이용자가 다수인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박씨를 고소한 전 매니저들을 비난하는 여론이 다수였다. 그런데 매니저들의 성별이 여성이란 사실이 밝혀지자 여론이 반전했다. 남성 매니저가 여성 연예인을 괴롭히는 서사가 강한 연예인이 약한 매니저를 괴롭히는 서사로 급변한 것이다. 매니저들을 남성으로 지레짐작해 무작정 비난하던 모습이 어처구니없었지만, 그 반대의 모습도 어처구니없긴 마찬가지였다. 이건 기괴해도 사소한 해프닝이라고 치겠다. 익명의 공간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이런 음침하고 뻔뻔한 사태가 수시로 반복돼왔으니까.

그보다 더 기괴한 건 조씨를 둘러싼 반응이었다. 정치권이 나서서 논란의 중심에 놓인 연예인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준 건 이례적이었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청소년기의 잘못이 이후 수십 년 동안 성실하게 살아온 삶까지 모두 지워버릴 만큼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항변했고, 누군가는 조씨를 범죄자에서 성자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준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에 빗대 동정했다. 문화예술계의 누군가는 “빌어먹을 폭로로 인해 한국 영화의 소중한 배우 자산이 사라졌다”고 분통을 터트렸고, 심지어 “소년원 근처에 안 다녀본 청춘이 어디 있느냐”던 누군가도 있었다.

그런 반응 모두 나름대로 일리는 있다. 소년법 제32조 제6항은 “소년의 보호처분은 그 소년의 장래 신상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청소년기에 저지른 범죄로 낙인을 찍는 건 회복과 재사회화를 목적으로 하는 소년법의 근간을 흔든다는 일각의 주장에도 공감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친여 성향으로 비칠만한 행보를 보여줬던 조씨가 아닌 다른 연예인의 비슷한 과거가 폭로됐다면 과연 같은 반응이 나왔을까. 누구보다 성범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해온 여성 단체까지 침묵하는 모습은 기괴함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이 모든 반응이 진영논리에 따른 선택적 분노로 보이는 건 오해일까. 이런 기괴한 풍경은 사회 지도층조차도 무책임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처럼 우리 편이냐 아니냐로 옳고 그름을 가리고 있다는 잘못된 ‘시그널’을 남겼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때 진영논리에 따라 기준이 흔들리고 흐린 눈을 뜨는 시대. 뻔뻔하게 편 가르기는 이 같은 시대의 생존전략일지도 모르겠다. 사이코패스를 다룬 드라마의 범람은 뻔뻔함이 ‘뉴노멀’인 시대의 초상을 앞서 가늠한 징후가 아니었을까. “올해는 인간을 믿기 어려운 해”였다던 챗GPT의 한 줄 정리가 의미심장하게 읽혔다.

정진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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