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략은 아무나 쉽게 세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장을 꿰뚫는 직관, 기술 흐름에 대한 통찰, 규제와 고객 신뢰를 함께 고려하는 균형 잡힌 안목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전략은 실효성을 가진다. 특히 금융, 기술, 제도 환경이 복합적으로 얽힌 핀테크 산업에서는 그 전략의 무게가 더욱 크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전략 수립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기획 업무의 상당 부분이 자동화되면서, 과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던 작업들이 이제 몇 시간 만에 완료된다. 챗GPT, 클로드(Claude), 제미나이(Gemini)와 같은 AI 기반 도구들은 방대한 시장 데이터를 요약하고, 유사 사례를 분석하며, 전략 초안을 빠르게 구성해낸다.
이 변화는 기업의 관심을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그 일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로 빠르게 옮겨놓고 있다.
전략 수립의 장벽이 낮아진 지금, 실행 역량이 곧 경쟁력이 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실행'이라는 과제가 기업 경영에서 가장 어려운 영역이다. 전략보다 실행이 어렵다는 사실은 현장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핀테크 산업은 그 중에서도 실행의 난이도가 특히 높은 분야다.
기술의 민첩성과 금융의 안정성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핀테크 산업은 실시간 거래 처리, 보안 확보, 사용자 신뢰, 규제 대응 등 다양한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켜야 한다. 전자금융거래법, 자금세탁방지법(AML), 개인정보보호법, 금융소비자보호법 등 여러 규제가 중첩되고 충돌하는 환경 속에서, 단지 전략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이뤄지지 않는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해외송금 사업이다. 단순히 시스템을 개발한다고 해서 사업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각국의 외환 규제를 검토하고, 수취 파트너의 법적 지위를 확인하며, 정산 구조를 설계하고, 계약서를 마련해야 한다. 여기에 감독당국과의 유권해석 협의, 보안 요건 대응, 내부 통제 설계까지 포함하면, 단 하나의 실행이 수십 개의 병렬적인 작업으로 구성된 복잡한 공정임을 실감하게 된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핀테크 기업도 이 과정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실행은 전적으로 사람의 손에 의존했고, 상당한 시간과 인력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성형 AI가 실행 준비의 여러 단계를 보조한다. 국가별 규제 정리, 경쟁사 벤치마킹, 계약서 초안 작성, 회의록 요약, 후속 업무 처리 방안 마련 등에서 일정 수준의 자동화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AI는 실행을 '준비'할 수는 있지만, '책임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실행의 구조를 설계하는 일은 AI가 맡을 수 있지만, 그것을 조직 내 현실로 끌어내고, 변수를 관리하며, 결과에 책임지는 일은 철저히 사람의 몫이다.
현장은 언제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외부 파트너의 일정 지연, 법률 해석의 불일치, 시스템 연동 실패, 고객 민원, 내부 리소스 충돌 등 각종 변수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러한 변수들은 데이터나 알고리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오로지 사람만이 즉각적인 판단과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핀테크 산업은 본질적으로 규제 기반 산업이다.
금융당국과의 협의, 유권해석 요청, 라이선스 요건 검토 등은 기계적 해석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민감 정보 보호, 자금세탁방지, 소비자 응대 등 고위험 업무일수록 실무자의 경험과 책임 있는 실행이 중요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한국핀테크산업협회는 산업 전반의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AI 협의체'를 출범한다.
이 협의체는 생성형 AI가 핀테크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기술 도입 현황과 제도 개선 수요, 보안과 소비자 보호 이슈 등을 함께 검토할 예정이다. 궁극적으로는 핀테크 기업들이 실행 중심의 조직으로 진화해 나갈 수 있도록 산업 차원의 지혜를 모으는 협력 플랫폼이 될 것이다.
AI가 전략을 제안하는 시대에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실행은 누구의 책임이며, 조직은 어떻게 성과를 만들어야 하는가. 이제 이러한 질문은 특정 리더나 임원만의 몫이 아니다. 모든 구성원이 함께 풀어야 할 조직 전체의 과제가 되었다.
AI는 전략을 만들고 실행의 일부를 자동화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제약과 예외를 조정하고, 조직 상황에 맞게 전략을 재조율하며, 최종 성과에 책임을 지는 일은 결국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특히 핀테크처럼 규제, 보안, 신뢰가 얽힌 산업에서는 기술과 사람, 제도와 시장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실행 역량이 곧 기업의 생존력을 좌우한다. AI는 실행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지만, 실행의 완성은 인간의 책임감과 협업 없이는 불가능하다.
AI 시대 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 있다.
전략을 실현하는 힘은 기술이 아니라, 함께 실행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이근주 한국핀테크산업협회장·한패스 공동대표
〈필자〉 이근주 한국핀테크산업협회장은 IBK기업은행에서 스마트금융업무를 총괄한 후, 핀테크분야에서 전문성을 이어가며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소상공인간편결제사업추진단장, 한국간편결제진흥원장 등을 역임했다. 동국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는 외국인 전용 생활금융플랫폼을 운영하는 글로벌 핀테크기업 한패스(주)의 경영혁신부문 대표이자, 530여개 국내외 핀테크기업이 소속된 한국핀테크산업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