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해선 오래전부터 막연한 호감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해적판으로 봤던 ‘드래곤볼’, ‘슬램덩크’가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친구들과 돌려보며 낄낄거렸던 만화가 계기가 되어 영화, 소설 등으로 호감의 대상이 넓어졌고, ‘이렇게 재미난 걸 만들어 내는 나라는 어떤 곳일까’ 싶은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지난 3년, 도쿄 특파원 생활은 일본에 대한 막연한 호감을 살아보고 알게 된 구체적인 호감으로 바꾸어 놓았다.

나무, 꽃에 대한 일본인들의 애호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주로 단독주택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자투리만 한 공간이라도 있으면 나무와 꽃을 기른다. 좁은 정원이 버거워 보이는 덩치의 나무들을 키우는 집도 적지 않다. 거의 습관화한 게 아닌가 싶은 이런 문화 덕분에 도쿄 주택가 골목 걷기는 꽤 즐겁다.
기초질서를 잘 지키는 건 배워야 할 점이다. 대표적인 게 교통질서 준수다. 건널목 앞 정지선을 넘는 차가 드물다. 몇 걸음 정도면 건널 수 있는 도로에 설치된 신호등을 무시하는 보행자는 많지 않다. 안전을 의식해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차를 모는 게 분명한 운전자를 흔히 볼 수 있다. 효율성이 떨어지는 게 아니냐는 생각은 지금도 한다. 하지만 대형참사가 잦고, 그때마다 기초질서 준수를 소리 높이길 반복하는 한국 사회가 본받아야 할 점인 건 분명하다.
융통성 없음과 느림은 발전이 지체되고, 역동적이지 못한 일본의 상징처럼 이야기하지만 달리 볼 구석이 있다. 일본 생활을 시작할 무렵 구청에서 서류 한 장 떼는 데 몇 시간을 기다리고, 은행 카드를 받는 데 보름은 걸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함을 했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서류 작성할 때는 뭘 그리 꼼꼼하게 따지는지 글자 하나 잘못 썼다고 처음부터 새로 작성해달라는 곳도 있었다. 한국의 신속성, 유연성에 익숙한지라 짜증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융통성 없음은 원칙이 분명하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규칙에만 따르면 정확하고, 공평하게 결과가 나온다. 느린 것 또한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우리가 빠르게만 살아가려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지난 3년 일본 생활은 전반적인 ‘친일’의 과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우리와 다른 매력을 가졌고, 배울 것도 많은 나라인 게 분명하다. 하지만 친일이라고 하기엔 찜찜하고 불쾌하기도 하다. 무엇보다 한반도 침략에 대한 무지성, 몰염치는 겪을 때마다 부아가 돋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동의 현장인 사도광산를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며 했던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했을 때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역대 최악으로 평가됐던 양국 관계를 호전시키기 위해 윤석열정부가 갖은 노력을 기울일 때도 일본 정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반성을 하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이 지금보다는 나은 관계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건 3년간의 일본 생활에서 비롯된 나름의 짐작이자 강한 바람이다. 우리에게 좋고 싫음의 경계가 어느 나라보다 선명한 일본인지라 그 과정은 많이 덜컹댈 것이란 예상을 해본다. 양국이 좀 더 가까워져 진정한 의미의 친한, 친일이 늘어나길 기대한다.
강구열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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