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 흔히 토로하는 “다 내려놓았어”는 지극히 사르트르적인 표현이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의 ‘무화(néantisation)’와 ‘초월(transcendance)’ 개념은 스스로 양산하는 고통을 멈추고 새로운 본질을 돌아보는 존재론적인 각성을 의미한다. 연말이어서인지 ‘비워내고 다시 태어날 것’을 제안하는 작품이 다양하다.
안무가이자 비주얼 아티스트인 알렉산더 에크만의 무용극 <해머>는 경쟁과 자본, 기술에 매몰된 현대인들의 현주소를 고난도 무용과 퍼포먼스, 스펙터클한 비주얼 아트로 전시한다. 스웨덴 예테보리 오페라 댄스컴퍼니(카트린 할 예술감독)의 다양성과 다국적(20여개국 출신들) 에너지를 바탕으로 에크만이 직조한 에고이즘과 휴머니즘의 경계 넘나들기다. 거울로 뒤덮인 무대 바닥과 곳곳에 비치된 거울 앞에서 30여명의 무용수가 자아도취에 빠진 듯한 퍼포먼스를 각자의 독무에서 군무로 확장한다. 소셜미디어서비스(SNS)나 영상 플랫폼 등에 자신을 노출하기에 급급한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약육강식이 횡횡한 가운데 무대 위로 초대형 얼굴 이미지가 내려오고 같은 모양의 화려한 모피를 두른 무용수들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토크쇼의 한 방향 수다를 촬영한다. 각자의 말에만 열중하는 자기 과잉의 절정을 통해 극단의 공허함이 드러난다.
넘쳐나는 과잉과 소통의 마비 속에 맥락 없이 고양이 탈을 쓴 무용수가 등장하면서 막을 내리는 이 작품은 사르트르의 ‘무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볼 수 있다. 본질이라고 믿어온 것을 스스로 삭제하는 행위인 ‘무화’에서 공허는 가능성이다. 이를 직시할 때, 인간은 초월이라는 다른 존재의 층위에 닿는다. 존재에 대한 또 다른 층위를 각성하는 과정이다. 현대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온 모든 것들의 맥락이 삭제된 상황에서 전혀 다른 존재가 등장하는 극단의 퍼포먼스다.

부성의 재정의이자 감정적 확장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의 동명 영화가 원작인 <미세스 다웃파이어>(캐리 커크패트릭·존 오페럴 극본, 캐리 커크패트릭·웨인 커크패트릭 작사·작곡, 황석희 번역, 김동연 연출, 송희진 안무, 이엄지 무대, 김영빈 조명, 박준 영상)의 다니엘(황정민·정성화·정상훈 분) 역시 ‘무화’를 통해 새로운 본질로 향한다. 아내 미란다(박혜나·린아 분)와의 불화를 인식하지 못한 눈치 없고 직업도 없는 다니엘은 끝내 이혼당하지만 아이들이 그립기만 하다. 아내가 육아와 살림을 돕는 사람을 구한다는 것을 알고 다니엘은 미세스 다웃파이어로 분장해 위장 취업에 성공한다. ‘아버지’라는 프레임을 지운 자리에서 발견한 돌봄의 ‘초월’ 단계다.
새롭게 합류한 1000만 영화배우 황정민의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기존의 코미디와 웃음으로 점철된 캐릭터와는 달랐다. 액션과 폭소를 덜어낸 대신 치유와 감동을 채워 넣은 새로운 해석이다. 어수룩하지만 아이들과 관련해서는 누구보다 명민한 황정민의 다니엘이 보여주는 진정성이, 같은 배역을 하는 정성화와 정상훈 배우의 다니엘 해석에도 영향을 미쳐 확장된 가족 뮤지컬로 거듭났다.
이 작품의 절정은 마지막 상담 프로그램 장면이다. 다니엘은 더 이상 ‘가정을 지키지 못한 남자’도, ‘아이에게 미안한 아버지’도 아니다. 그는 미세스 다웃파이어라는 젠더·세대·역할을 초월한 돌봄 주체로 새로운 존재 가능성을 획득한다. 아버지라는 고정된 역할에서 탈피한 다니엘은 미세스 다웃파이어라는 ‘가정의 멘토’로 새로운 본질을 획득한다. 이 초월은 일시적 위장이 아니라 아이들이 실제로 사랑받고 구원받는 ‘신개념 부성’의 탄생이다. “아버지는 이렇게도 존재할 수 있다”는 동시대적 부성의 재정의이자 감정적 확장이다.
1970년대를 살아가는 재일한국인 가족의 일상을 통해 이주 난민들의 삶을 들여다본 <야끼니꾸 드래곤: 용길이네 곱창집>(정의신 작·연출, 시마 지로 무대, 카츠시바 지로 조명, 쿠메 다이사쿠 음악, 마에다 아야코 의상, 후쿠자와 히로유키 음향)은 어렵게 재건한 삶이 다시 붕괴하는 순간을 담아내고 있다. 용길(이영석 분)과 영순(고수희 분) 부부가 남한·북한·일본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세 딸과 막내아들을 가슴에 품고 다시 리어카에 살림과 몸을 싣고 유랑에 오르는 장면은 사르트르적 ‘무화’다. 1970년대 오사카 변두리의 함석지붕과 달동네의 풍경은 그 자체로 ‘경계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서늘한 기록이다. 철거는 단순한 환경 변화가 아니라 그들이 수십 년 동안 붙들어온 정체성(국적·언어·혈통)이 통째로 무너지는 ‘무화’의 순간이다. 그러나 그 자리를 비워낸 뒤 가장은 또 길을 떠나고 세 딸은 각각의 세계로 향한다. 그 걷는 몸짓은 절망이 아니라 초월의 첫걸음이다. 사르트르의 표현대로라면 존재는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미래로 이행한다. 함석지붕 위에서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이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막내아들의 영혼은 또 다른 초월의 장면화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기군상 원작, 고선웅 각색·연출, 이태섭 무대, 류백희 조명)은 다층적인 ‘내려놓음’을 담아내고 있다. 올해로 창작 초연 10주년을 맞아 대극장 버전으로 확장하면서 대의를 향한 깊이와 내려놓음의 진폭이 더 선명했다. 충신 조순(유순웅 분)을 시기한 무장 도안고(장두이 분)가 조순의 3족 300여명을 멸하고 권력을 쟁취했으나 결국 그 집안의 핏줄인 조씨고아(이형훈·박승화 분)에 의해 멸족된다는 권선징악을 다룬다.
정해진 본질 무너뜨리고 새 존재 선택
세밀히 들여다보면 사이사이 선택과 집착의 순간이 다양한데 고선웅 연출은 작품 속 딜레마의 중심에 조순 집안의 은혜를 받은 문객인 정영(하성광 분)을 두었다. 조씨 집안의 비극에 분개하고 간신 도안고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의 귀한 늦둥이 아들을 희생해 조순의 손자인 조씨고아를 살리는 역할이다. 그의 남은 삶은 복수로 점철됐고, 결국 복수의 씨앗인 스무 살 청년 조씨고아를 각성케 해 도안거의 삼족을 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십 년간 품어온 뜻을 이뤘음에도 정영에게 남은 것은 희생된 영혼들의 환대가 아닌 외면이다. 정영은 또 다른 조씨고아를 낳았다는 고통에 휩싸인다.
작품은 이 작품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며 막을 내린다. 이 이야기를 거울삼아 알아서 잘 살아가라는 훈계이자 조언이다. 폭력과 복수의 악순환에 들어서는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말고 부디 평화롭기를 바란다는 마지막 대사는 관객들을 작품에서 빠르게 빠져나오도록 돕는다. 작품 속 주인공들의 ‘무화’라기보다는 관객들의 심연에서 싹트는 ‘무화’와 초월의 순간이다. 작품은 관객들에게 묻는다. 정영에 의해 강제로 복수의 씨앗이 된 조씨고아는 이후 어떻게 살아갔을까?
사르트르는 “우리는 이미 정해진 본질이 아니라 선택의 연속으로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이들 작품은 모두 ‘정해진 본질’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존재’를 선택하는 인물 혹은 존재들을 무대에 올렸다.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다니엘은 아버지의 역할을 비우고 상담가 다웃파이어로 태어났다. <야끼니꾸 드래곤>의 용길 가족은 터전을 비우고 유랑하기에 이르고,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정영은 복수의 화신인 스스로를 비워내고 관객들에게 질문하기에 이르렀다. <해머>는 인간 자아 전체의 허위를 무너뜨린 후 고양이라는 완전히 다른 맥락의 유머러스한 존재를 제시한다. 당신은 무엇을 비워낼 수 있으며, 그 자리에서 무엇이 되기를 선택할 것인가? 어쩌면, 필자가 <해머>의 무대에서 만난 고양이는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작품들은 상연이 마무리됐고,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12월 7일까지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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