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를 찾아서] 이력서 쓰는 밤

2024-09-22

간판, 오밤중에도 몸 안에 불을 켜고 있는 것

단칸방에 홀어미 모시고 살던 배달 노동자 청년(22). 차선 넘어 방향을 바꾼 유턴하는 택시에 방향을 잃고 착지할 수 없는 순간, 어미에게 사 드리겠다는 집 한 채만 허공에 돈다, 막 돈다 맴맴 청년은 어제 두고 온 길 뚜둑, 뚝 무릎 꺾어 세우며 걷는 중이다

‘여기서는 유턴이 불가합니다. 이번 역은 수서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고 울먹울먹 삼킨, 육십 촉 알전구 어미 등짝 삼아 여섯 평 원룸 방바닥에 철퍼덕 엎드려 세상 아픈 모서리 버팀목 삼아 이력서 쓰는 밤!

누군가 허기진 청년의 잉크병에 푸른 심장을 가진 주검 덜컥, 놓고 간다

◇김승필= 2019년 계간《시와정신》등단. 시집『옆구리를 수거하다』(황금알, 2021). 청소년 고전『우리 고전 캐릭터의 모든 것』, 청소년 문학『국어 선생님의 시 배달』참여. 2021년 광주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중·고등학교에서 말랑말랑한 생각으로 똘똘 뭉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詩밭을 경작하고 있음.

<해설> 시인이 툭 던진 말은 ‘간판’이다. 배달 노동자 청년(22)는 단칸방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삶의 목표는 어머니께 집 한 채 사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내세울 그 무엇이 없다. 간판이 없다. 배달일을 하다가 유턴하는 택시에 무릎이 꺾인 모양인데 아무튼 삶이 곤궁하다. 지하철을 타고 여섯 평 원룸에 지치고 망가진 몸을 철퍼덕 던져놓고 세상 아픈 모서리 버팀목 삼아 이력서 쓰는 밤이다. 이 시는 스토리를 담고 있는데 결국 스토리는 마지막 연의 운문을 끌어내기 위한 포석으로 읽힌다. 시의 맛은 결국 “누군가 허기진 청년의 잉크병에 푸른 심장을 가진 주검 덜컥, 놓고 간다” 에 있다. 푸른 심장을 가진 주검이니, 청년에게 지금 보다는 괜찮은 일자리가 생기기를 기대해 본다. -박윤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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