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저널]배문석 시민기자= 12월 22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정판사 위조지폐사건 재심 선고공판. 그렇게 원했던 이관술에 대한 무죄가 선고됐다.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일제에 맞서 항일 혁명운동을 펼쳤던 이관술, 해방 후 첫 정치 여론조사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5위로 민중의 지지를 받던 지도자 이관술을 위폐범으로 증거를 조작하고 사법 살인한 미군정기 재판을 뒤엎은 것이다.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신청했던 2023년 7월, 그때 재심 결과를 낙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경욱 변호사가 신청인 손옥희(이관술의 외손녀)를 만나 재심을 논의했고 이후 신윤경 변호사(법무법인 동화)가 합류다. 재심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가 더 컸다.
2023년 재심 신청, 낙관은 없었다
이관술 유족뿐 아니라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는 재심 이전까지 독립운동가 서훈이 더 빠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후 사회주의 계열뿐 아니라 독립유공자 서훈을 늘려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기 때문이다. 2019년, 공적서를 작성해 보훈처(현 국가보훈부)에 서훈 신청을 했지만 결과는 ‘광복 이후 행적 때문에 심사를 보류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없지만 누구나 이관술이 위폐범이란 누명은 쓴 ‘정판사 조작사건’ 때문이라고 여겼다. 실망한 유족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2020년 발족한 제2기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이하 진화위)를 찾아갔다. 이관술의 독립운동을 규명해달라는 것과 함께 정판사위폐사건의 진실을 규명해달라는 조사 신청을 함께 냈다.
하지만 진화위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당시 위원장은 면담 과정에서 정판사 건은 신청해도 기각될 수 있다는 맥 빠진 답을 줬다. 결과도 그랬다.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후 2기 진화위 후반부 위원장이 바뀐 뒤 즉각 기각됐다. 게다가 독립운동 활동 조사도 활동 종료까지 조사 결과 없이 중단했다. 그 과정에 재심을 해보라는 조언을 받았다. 유족들은 결과를 낙관할 수 없지만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정판사 ‘조작’ 사건을 수면 위로
정판사 위폐사건은 현재 ‘조작 사건’이라는 말로도 불린다. 2015년 임성욱 박사가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논문을 발표한 후 4년 뒤 대중서로 발간했고, 2023년 김상구 선생이 <정판사 조작 사건>으로 관련 사료를 집대성한 단행본을 발간했다.

사실 임성욱 박사가 논문을 발표한 후 이를 반박하는 어떤 연구 결과도 없었기에 역사, 사법학계는 학술적으로 1946년 미군정의 지휘 아래 경찰과 검찰 그리고 사법부가 조작한 사건이란 점이 통용돼왔다.
하지만 재심으로 79년 전 재판 결과를 뒤집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고 여겼다. 정판사 사건 이후 대한민국 권력의 상층부를 차지해온 세력들이 누구인가. 특히 친일 잔재가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양한 비판을 받아온 사법부가 과거를 반성할지 의문이었다.
재심 신청 후 1년이 지나 2024년 7월 5일, 재심 개시를 다툴 첫 심리가 열릴 때도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더구나 1차 심리 시작 때 “야만의 시대에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언급했던 재판장 허경무 판사는 2, 3차 심리를 거치며 부정적인 이야기를 거듭했다. 주심을 제치고 배석판사가 나서 “미군정기 재판을 재심할 수 있는가”, “법정 자료가 부족한데 가능한가”라는 말을 쏟아냈다.
3차 심리(2024. 9. 10.)가 끝났을 때는 만약 재심이 기각된다면 어떻게 부당하고 불법적인 사건을 여론 수면 위로 올릴 수 있나만 생각했다.
내란 후 바뀐 재판부, 재심 개시
4차 심리는 무려 11개월 뒤인 올해 8월 26일에 열렸다. 내란 후 재판부가 바뀐 것이다. 우리는 앞선 재판부와 바뀐 재판부의 차이를 알 수 없었기에 불안했다. 앞선 심리 내용을 확인한 후 추석 이전에 재심 개시 여부를 확정해 통보하겠다는 말과 함께 심리가 끝났다.
가뭄에 단비 같은 재심 개시 확정은 10월 13일 나왔다. 변호인과 신청인 손옥희에게 서면 통보가 오기 전 법률신문에 실린 기사를 통해 확인했다. 그 내용은 앞선 판사가 쟁점이라고 했던 부분들을 조목조목 정확한 법리로 해석한 내용이었다. 이관술을 비롯해 동료 피고인들의 불법 구금 기간과 진술 증거 능력을 짚으며 현 대한민국 형사소송법의 기준에 따라 재심이 가능하다는 결정이었다.
첫 재심 공판은 11월 11일, 2차 공판은 11월 26일이었다. 보통의 재심 진행보다 속도가 빨랐다. 당황한 검찰이 한차례 기일을 늘려달라고 요청하자 재판부는 12월 15일 최종변론과 함께 그 일주일 뒤 선고기일을 함께 고시했다.
대한민국 사법 역사에 기록될 2025년 12월 22일 오전 10시 정판사 위폐사건 피고인 이관술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 서울중앙지법 502호 법정은 방청객이 모두 앉지도 못할 만큼 많은 이들로 붐볐다. 공판 시간에 맞춰 형사 21부 판사들이 모두 들어와 착석한 후 법정의 분위기는 매우 차분한 정적이 흘렀다.
재판장 이현복 부장판사는 선고에 앞서 재심청구인 손옥희(이관술의 외손녀)와 변호인을 향해 “험난한 과정이었을 텐데, 재심 개시 후 본안심리를 거쳐 판결까지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지난 최종변론에서 무죄를 구형한 검찰에 대해서는 “중립적 입장에서 절차 진행에 적극 협조”해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현행법상 이관술만 다뤄야 해 아쉽다”
재판장은 “현재 사법체계 하의 소송절차에서 소송물인 개별 대상에 대한 심판권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재판부가 “피고인(이관술)에 대한 부분을 넘어 사건(정판사 조작 사건) 자체의 실체까지 선언할 수 없다”는 점에 양해를 구했다. 아울러 “판결이 망 이관술 선생과 유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최종변론에서 변호사와 신청인이 사건 자체의 무죄를 밝혀달라고 요청한 것에 대한 화답이었다. 재판부는 현행법이 지닌 한계를 설명하며 아쉬움을 표한 것이다. 공판 초반, 선고 내용을 듣기 전에 이미 무죄 판결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눈치가 빠른 방청객들은 나직하게 탄성을 터트렸다.
재판부가 정판사 조작 사건 자체의 실체를 규명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핵심 피고인 이관술이 무죄라면 1946년 당시 위법한 판결이 있었음을 확인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울러 이관술의 후손 외에 아직 정판사 조작 사건 희생자들의 후손을 찾지 못했으나 추후 똑같은 재심 결과가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재판부는 그 뒤 20여 분에 걸쳐 선고이유를 밝히고 최종 무죄를 선고했다. 선고이유는 이미 지난 10월 13일 재심 개시를 결정할 때부터 인용했던 법리를 재확인하는 것과 같았다.

불법 구속과 고문으로 받은 자백은 증거 효력 없음
검찰은 1946년 11월 28일에 열린 1심 판결문과 1947년 4월 11일의 2심 상고기각 판결문을 주요 증거로 제출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해당 증거가 수사와 공판 절차에 문제가 있다면 단순한 전문이나 재전문 증거에 불과하다고 전제했다. 수사와 공판 절차의 위법성이 핵심 쟁점이 된 것이다.
그런데 검찰 역시 최종변론 공판에서 무죄를 구형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심각한 위법이 드러났다. 재판부는 당시 인신구속의 기준은 조선형사령에 적시된 ‘10일’이었고 갱신도 허용되지 않았는데 이를 위반해 피고인들이 60일 이상 불법 구금됐음을 확인했다. 재심의 피고인인 이관술 역시 38일 동안 불법 구금했기 때문에 해당 수사절차는 명백한 위법이며 그 결과도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두 번째로 피고인 이관술 뿐 아니라 송언필, 박낙종 등 공동피고인 대부분의 진술 증거가 수사부터 법정 진술까지 일관되게 위폐 가담 사실을 부인했기 때문에 고문 등 불법적으로 얻은 진술은 모두 위법수집증거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관술 무죄 선고 뒤 환호와 눈물
최종 선고가 ‘무죄’라는 단어로 정리된 순간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어떤 이는 만세를 외쳤고 또 다른 이는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변호인 옆에서 선고 내용을 집중해서 듣던 신청인 손옥희를 비롯한 유가족들은 눈물을 흘렸다.
재판정을 가득 채운 환호와 희열은 판사들이 다음 재판까지 휴정을 선언하고 모두 빠져나간 뒤에도 지속됐다. 법정 밖 복도를 걷고 법원 건물 앞에서 둘러선 때에도 열띤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런 열기를 받아 바로 진행하려 했던 입장 발표는 법원 경비들에 의해 가로막혔다. 사진 촬영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자유로웠고 지난 재심 재판 때와는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은 바로 윤석열 내란 재판 36차 공판이 있어서였다.
결국 법원 서문 밖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준비한 무죄선고 입장문을 낭독하고 유족을 대표해 손옥희가 눈물 섞인 소회를 밝혔다. 그 핵심 내용을 정리하면 “정판사 위폐사건은 국가폭력과 사법이 결합할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반면교사”라는 것이며 이번 무죄 선고까지 진실을 역사 교과서에 기록해 비극을 반복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아울러 이관술에 대한 무죄 선고가 “불의한 과거와 단절하는 반성문이자 민주주의와 법치의 토대를 다시 세워 정의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결의문”이 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설 것을 요구했다. 그 시작이 이관술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이라고 주장했다.
이관술과 동지들의 명예 회복, 독립유공자 서훈
이관술의 외손녀 손옥희는 재심 법정에서 여러 차례 재판부를 향한 간절한 염원을 밝혔다. 선고일에는 설움과 기쁨이 북받쳐 자주 울고 웃었다. 노년의 병환에 시달려 입원 중인 어머니 이경환 여사를 비롯해 유족들이 당한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손옥희는 할아버지 이관술을 기억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달려온 이들을 한 명씩 언급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검찰이 무죄를 구형했기에 상고 없이 확정된 재심 결과를 보면서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독립운동 국가유공자 서훈을 이야기한다. 보훈부가 6년 전 공적 심사에서 탈락시켰던 것을 이번 재심을 통해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정판사 위폐사건 재심이 현행법 때문에 신청한 이관술만 무죄를 선고했다면 그 실체를 보다 정확히 드러낼 후속 사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진정한 명예 회복은 이제 시작일 뿐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는 그 시작으로 울산시청과 교육청에 이제 정부 기관, 특히 지방정부가 선양사업에 나서라고 현수막을 걸었다. 이관술 유적비조차 곳곳이 깨진 채 입암마을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지 않은가. 울산교육청은 2019년부터 울산교육 독립운동가를 선양해왔으니 이관술을 포함시켜야 하지 않는가. 아울러 독립유고장 서훈을 위한 활동을 지역사회가 다 같이 나서야 할 것이다.
이관술 후손들과 기념사업회는 그런 바람을 안고 올해 마지막 날, 12월 31일 오후 2시 대전 산내면 골령골을 찾아간다. 이관술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복역하다 1950년 7월 3일 끌려가 학살당한 장소다. 그곳에서 고유제를 올려 이관술 뿐 아니라 함께 학살당한 송언필 그리고 무고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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