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스파이 전쟁’ 탐구
〈제4부〉스파이 잡기 30년, 하동환 전 국정원 대공수사단장의 비망록
6화. “종이에 쓰지 마라, 통화음은 암호” : RO 보안수칙의 실체
종이에 쓰지 마라.
공중전화만 사용하라.
스파이의 내부 보안수칙은 이와 같이 정리돼 있다. 그들은 기억에 의존한다. 회합 장소는 e메일로 보내지 않는다. 공중전화만이 가능한 통신 수단이었다. 회의 중엔 노트북 전원이 꺼져 있어야 했다. 하드디스크는 6개월마다 교체했고, 모든 문서는 암호화된 USB에만 저장됐다. 제목은 ‘여름 휴가 일정’ ‘경영학 수업 내용’과 같이 조직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으로 위장됐다.
위급 상황을 대비해 복구가 불가능한 파기 프로그램을 따로 사서 썼다. 수사기관 미감(尾監·미행감시를 뜻하는 은어)을 피하기 위한 ‘꼬리따기’는 훈련처럼 반복됐다. 그들은 서로의 실명을 부르지 않았다. 오직 조직명(가명)으로만 불렸다. 간혹 ‘김형’ ‘박형’처럼 성을 붙인 애칭은 허용됐다. 회합 내용을 종이에 쓰는 일도 금기였다. 어쩔 수 없이 조직과 관련된 일을 썼다면 소각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들에게는 암기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기록 매체였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국회의원을 비롯해 100명이 넘는 혁명조직(RO) 사이에 전파된 보안수칙이었다. 국가정보원은 RO 사건 수사에서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를 적용하려 했다. 반국가단체 혐의를 적용하려면 조직 내부 강령과 함께 명확한 지휘 통솔 체계를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RO는 보안수칙에 따라 조직 강령이 드러나지 않았고, ‘단선연계 복선포치’(하부 조직원은 직속 상부선에게만 보고할 뿐 서로 알지 못하게 하는 간첩 조직 원리)를 철저히 적용해 총책부터 하부망까지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지휘통솔체계가 담긴 문서도 끝내 나오지 않았다.
다만 조직 정보를 어떻게 감추는지, 수사관을 따돌리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정리한 보안수칙은 제보자를 통해 파악됐다. 지난 21일 취재팀은 하동환(58) 전 국정원 대공수사단장에게 2014년 2월 작성된 RO 1심 판결문에 기록된 그들의 보안수칙을 보여줬다. 12년 전 당시 RO의 핵심 조직원 조모(당시 50세)씨를 미감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조씨는 경기도 성남의 한 주택가에서 살았다. 가파른 비탈에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지역이었다. 그는 직장인 서울 여의도로 출근하기 위해 오전 4시30분에 집에서 나왔다.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수사관의 미감 여부를 확인한 뒤, 모란역에서 오전 5시30분에 지하철 첫차를 탔다. 그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승강장 가장 끝으로 갔다. 하동환은 “사람이 드물고 모퉁이에 있는 장소라 미감이 오는지 확인하기 좋은 위치”라고 말했다.
RO 조직원이 지하철 첫차를 보내는 이유
조씨는 간혹 지하철을 타기 직전 갑자기 멈춰 첫차를 그냥 보내는 습관도 있었다. 그를 뒤쫓던 수사관으로서는 난감한 상황이다. 그를 따라 지하철을 타지 않는다면 신분이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할 수 없이 지하철을 탄 뒤에 다음 역에 내려서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발을 출입문 바깥으로 빼는 척 나가려다가도 다시 들어오기 일쑤였다. RO 보안수칙에서는 이런 행동을 ‘꼬리따기’라고 불렀다. 수칙에는 ‘버스로 이동할 때는 목적지 전 정류장에서 내려 도보로 이동하며 미감 여부를 확인한다’고 적혔다.